신학자료

3. 아리우스 논쟁(Arius Controversy)

크레이지티처 2021. 3. 15. 12:35

논쟁의 배경

아리우스 논쟁에 있어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에 대한 신학적 변증에 있다.

아리우스(256~336)는 바우칼리스(Baucalis)라는 교구 교회를 담당하던 장로였다.

원래 이 교회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이었던 알렉산더(Alexander)가 관할하던 12교구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졌었다고 알려져 있다.

알렉산더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나님으로 믿었고, 아리우스는 그를 단지 하나님의 성품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으로 존재로 가르쳤다.

즉,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 시부터 성부와 동일한 본질'로 보았고, 후자는 '성부에 가까운 신적 유사 본질'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다.

헬라어 철자 '이오타( ι )' 하나가 동일 본질(ὁμοούσιος)와 신적 유사 본질(ὁμοιούσιος)를 구분지었다는 점에서 '이오타 논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아무튼 당연히 이 둘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발생했고, 이것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역설적이게도 삼위일체론이 제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신학자들은 아리우스 논쟁을 '삼위일체 논쟁'으로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이 논쟁이 교회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밀라노 칙령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주후 313년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 논쟁은 318년 경에 시작되었다.

당시의 교부들은 이런 교리적 갈등이 오랜 박해에서 벗어나 이제 막 부흥기에 접어든 기독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하게 된다.

그들은 신속하게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연달아 개최하여 이 문제를 매듭짓게 된다.

 

아리우스의 신학적 배경

아리우스의 주장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가 살았던 도시의 배경을 잠시 들여다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AD 3~4세기의 알렉산드리아는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과 더불어 동로마 제국의 3대 도시로 꼽히는 도시였다.

거의 100만 명에 가까운 거주민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정복왕 알렉산더 대제의 이름을 딴 이 도시에 살았던 아리우스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이 지역 출신의 또 다른 신학자 오리겐(Origen, 185~254)의 그 유명한 '로고스' 사상 역시 이 흐름에 편승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다시 위에 언급된 알렉산더 감독과 아리우스 장로 사이의 논쟁을 촉발하게 된다.

 

여기서 교부 클레멘트의 제자이자 당시 신학 교육의 요람이었던 세례문답학교의 교장이었던 오리겐의 삼위일체론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삼위일체를 아버지(Autotheos) - 아들(Logos) - 성령(Pneuma), 이런 도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소위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으로 불리는 이런 주장은 영혼을 일자 - 누스 - 영혼으로 세분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설명 양식과 아주 유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영지주의 및 단일신론을 타파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결국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결정적으로는 오리겐이 성자의 위격을 설명하면서 신성 측면에서는 성부와 비슷하다는 논조와 함께 로고스의 영원성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할 때 로고스의 침투로 인해 인성이 신성이 되었다는 설명은 역동적 단일신론, 즉 양자설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변증으로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오리겐의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은 알렉산더의 후임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아다나시우스에 이르러 정통 삼위일체론으로 정립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아리우스에게도 신학적 배경을 제공하게 된다.

신학적 토대를 쌓아올리는 과정 중에 있던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기회비용인 셈이었다.

지난  회에서 이미 '역동적 단일신론 혹은 양자설'의 주장의 핵심은 '예수의 의지와 인성' 강조에 있음이 검토된 바 있다.

아리우스는 사모사타의 바울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성부로부터 출생한 성자는 성부에 종속한 자, 즉 다른 누구보다 높지만 본질상 성부와 다른 분임을 명확히 했다.

이는 오리겐의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을 교묘하게 변형한 것과 다름없다.

 

아리우스 신학의 핵심

아리우스의 생각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책은 남아 있지 않고, 아다나시우스의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같은 단편이나, 아리우스가 지은 것이라고 보이는 '향연'이란 노래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목창균은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라는 그의 저서에서 아리우스 논쟁을 '좌파 오리겐주의와 우파 오리겐주의'의 갈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곧 그만큼 오리겐의 신학이 애매모호한 점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후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는 자신의 산하에 있던 12개 교구 감독 및 장로들을 초청하여 일종의 단합대회를 개최하였다.

물론 아리우스도 이 자리에 초대되었다.

예배 후 강론에서 알렉산더는 동일본질에 입각한 삼위일체론을 설파했다.

이때 아리우스가 일어나 그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에 가깝다고 비판하면서,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이는 곧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질이 아님을 증명하는 꼴이라고 부연 설명하게 된다.

이런 '낳았다'는 말에 대한 직관적인 해석으로 인해 당연히 논란이 일게 되었다.

 

아리우스에게 있어서의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 곧 '말씀', 혹은 '진리'이다.

인간의 육체가 변하듯이, 당연히 그리스도도 역시 변화하는 존재이고, 결국엔 변하는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게 된다.

이런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 되어 버린다.

위에 언급된 아리우스의 노래 '향연'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여, 너는 온 도시의 말씀이다. (중략) 만일 당신이 로고스 교리를 원한다면, 나는 그것을 열렬히 섬길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낳으셨고, 그가 출생하기 전, 그는 존재하지 않았었다"라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결국 AD 318년 알렉산더 감독은 감독회의를 소집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신 동일본질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것을 아리우스에 권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2년 후, 알렌산더는 100명 이상이 모인 지방 종교 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과 함께 지방으로 추방하게 된다.

 

니케아 종교회의(Nicaea Council, 325년 5월~7월 25일) : 아리우스 논쟁의 종식

사실 당시의 거대한 로마제국은 동과 서로 나뉘어 각기의 황제와 부황제들이 통치해야만 했다.

교회 역시 동방과 서방교회로 나뉘는 상태가 되었고, 이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해석 역시 이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서방교회는 터툴리안(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AD 약 155년~ 240년 경)이라는 걸출한 학자에 의해 동일본질적 삼위일체론이 확립되었으나, 아리우스가 속해 있던 동방교회는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많은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감독에 의해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된 사건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며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려던 콘스탄틴 황제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을 교회 감독 중의 감독이라고 스스로 여겼던 황제는 궁중 감독인 호시우스를 보내 중재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대대적인 종교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심한다.

 

황제는 325년 5월에 니코메디아 근처의 니케아 호수에 있는 자신의 여름 별장에서 이 모임을 개최한다.

건설 중이던 제국의 새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새 궁전이 아직 완공되지 않은 탓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종교회의의 목표는 아리우스 논쟁 및 여러 교회 문제의 해결이었지만, 사실은 황제가 추구하는 정치와 종교의 통합을 통한 진정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구축이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니케아 종교회의는 세계 최초의 교회 회의(The First Ecumenical Council)의 성격을 가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참석하였고, 의장은 코르도바 감독 호시우스가 맡았으며, 알렉산드리아 측에서는 알렉산더와 아다나시우스, 안디옥 측에선 마르셀루스와 유스타티우스 등 총 318명 정도가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아리우스도 참석은 했으나 감독이 아닌 이유로 발언권은 얻지 못하였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은 관계로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아리우스를 대신하여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가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기에 성부와 다른 본질을 지닌 분이라는 신조를 낭독하게 된다.

이어서 유스타티우스가 이에 대한 반론을 강력히 제기하자 장내에 소란이 일고, 황제가 이를 말리며 정회가 선포된다.

잠시 후, 속개된 회의에서 유세비우스에 의해 그리스도의 유사본질이나 동일본질이라는 어휘를 빼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문구를 삽입하는 절충안이 제시된다.

하지만 황제가 새로운 세례 신조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다'이란 말을 추가하자고 제안하면서 새로운 상황이 연출된다.

황제의 새 제안이 포함된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선언문(신조)의 내용 중 핵심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이를 믿습니다;

또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는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지음을 받지 않으시고 성부와 하나의 본질에서 나음을 입으셨으니, 그로 인해 만물, 곧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지음을 받았으며, 우리 인간들을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강생하시어 육신이 되시고, 인간이 되셔서 고난 받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고,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또한 성령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없었던 때가 있었고, 그가 나기 전에는 없었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그가 무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그가 다른 어떤 휘포스타시스나 실체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되었다든가 가변적이라든가 변이되었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공교회요, 사도적인 교회가 선포하노니 저주가 있을지어다

 

이 신앙고백은 아리우스파의 완벽한 패배를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었고, 알렉산더 감독에 의해 주도되었던 아리우스 정죄는 재확인되었다.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에 맞추어진 선언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성부와 성령에 관련된 부분은 매우 짧다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나 성령 이후의 문단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세력을 핀셋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의회에 참석했던 일부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하게 된다.

황제는 이들을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게 되고, 아리우스 역시 이들과 동행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 남은 아리우스파는 정확히 니케아 공의회 폐막 2년 후, 4번에 걸친 종교 회의를 거치면서 니케아 신조들을 전부 뒤집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다나시우스는 변심한 황제의 명령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제국의 새 수도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성사도 교회에서 개최된 자신의 복권과 파송의식에 참석한 아리우스는 갑작스런 복통으로 화장실에서 사망하게 된다.

이후 AD 336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잔존하던 아리우스주의자들 모두가 이단으로 정죄된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사이의 10년 동안 기독교 정통 교리를 온 몸으로 수호한 사람이 바로 아다나시우스라고 할 수 있다.

후에 기회가 있으면 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