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손에서 놓지 않기
주변의 입시생을 만나보면 대체로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는 하소연을 많이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많은 과목을 동시에 공부해야 하니 참 딱한 형편들이지요,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논술을 위한 책 읽기는 좀 무리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논술 평가를 요구하지 않는 대학교가 더러 있다는 것도 한 요인이 되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이 논술을 입시 과목으로 택하고 있는 이 현실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단언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책 읽기는 습관입니다.
내용 파악은 그 다음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책을 손에서 놓는 순간 논술 시험 성적은 보나 마나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책을 읽으면 내용을 통째로 암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독서를 하나의 과목처럼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논술로 대학에 들어가려는 입시생들에는 이 방법은 정말 권하고 싶지 않네요.
시간을 금쪽같이 써야 할 학생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천천히 암기하듯이 정독하는 것이 좋은 독서법입니다만 일종의 비상상황인 고3 학생들에겐 좀 사치라는 생각입니다.
논술은 글쓰기 능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입니다.
갑자기 공부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대학에서 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죠.
따라서 '이 책은 누가 썼느냐?' 혹은 '책 내용은 요약해서 써 내시오'라는 식의 논제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논술 중에 자신이 인용한 문장의 저자를 밝히면 가산점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중요한 것은 논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주장과 결부하여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입시생들의 독서는 '논지 파악 능력 배양을 위한 습관'을 기르는 쪽으로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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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콕 집어내기
핵심어는 곧 책의 중심어입니다.
그 코어 워드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술되지요.
그 어떤 저자도 자신의 책을 중언부언 써 내지 않습니다.
추상어와 논리 비약으로 가득한 시조차도 그러합니다.
저는 이것을 메이저 텀(Major Term: 이하 MT)으로 부릅니다.
이 MT는 마치 해수면 위에 돌출된 빙하와 같습니다.
북극해 주변을 항해하는 대형 선박의 선장들은 이것을 보고 수면 아래에 있을 초거대 빙하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바다를 관찰합니다.
논술을 준비하는 입시생들은 바로 책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일등항해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빙하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수면 위에 떠 있는 조그마한 빙산'입니다.
글의 내용을 잘 분석하려면 빙산의 일각 같은 이 핵심어, 즉 MT를 콕 집어내는 능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빙산의 일각 같은 이 MT를 어떻게 잡아낼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이 MT는 짧은 글이나 긴 글을 막론하고 그 안에서 자주 사용되는 명사라고 이해하면 참 쉽습니다.
소설의 경우에는 주인공이 자주 사용하는 어휘, 논리적인 글에선 반복되는 특정 개념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이 녀석들이 반복어 사용을 피하기 위해 자주 모습을 바꾼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가령 '실존'이란 개념어는 때때로 '현존재'로, 심지어 '기투된 존재'로 변신을 거듭합니다.
이 세 어휘가 한 페이지에 나온다고 가정하면, 각각 다르게 정의된 개념어로 헷갈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선 결국 독서량이 중요합니다.
그 어떤 책이든 무한대로 용어 반복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고, 일정한 사이를 두고 그 핵심어는 다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자주 책을 읽다 보면 이 MT를 중심으로 저자의 저작 패턴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 일부러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고3 1년 동안은 만화책이나 웹튠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것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이미지가 강화된 책들은 글쓰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책을 습관적으로 읽다보면 같은 의미를 지닌 개념어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책 내용을 암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핵심어를 잡아내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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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MT) 보물찾기 게임
저는 여의도, 목동, 그리고 대치동의 영재교육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론 및 과학 철학 관련 서적을 주로 읽었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칸트, 데카르트, 하이데거는 물론 화이트헤드 같은 분들의 책들이었죠.
소설과 미래학과 관련된 서적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쓴 책들을 중심으로 MT 발견을 위한 보물찾기 게임을 매 강의마다 실행했었습니다.
고액의 강의료를 지불한 부모님들은 고교생은 물론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플라톤의 책들을 읽을 수 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강 첫 단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죠.
읽어야 할 책 제목만 제시해도 뜨악하는 표정들이 역력해으니까요.
페이퍼 요약은 고사하고 개념어 하나만 나와도 책읽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허둥지둥이었습니다.
책읽기가 안 되는데 글쓰기는 언강생심이었습니다.
논술을 앞둔 고 3 학생들도 칸트의 '판단 정지'란 용어 하나 때문에 제대로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개념어를 설명하기 위해 꼬박 30분이 걸린 적도 있었죠.
이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 방법론이 바로 이 'MT 찾기' 게임이었습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초등학교 5학년 중급반의 경우를 사례로 인용하겠습니다.
그 클래스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선택하여 MT 찾기 게임을 시도했습니다.
학생들에게 30분 정도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절대로 책 내용을 암기하는 헛수고를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구요.
뜻은 잘 몰라도 반복되는 단어 가운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휘에 원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의식적으로 하지 말고 무의식적으로 말입니다.
책 내용을 축약하거나 특정한 부분을 암기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쉽게 접근을 하더군요.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제일 많이 선택한 것들이 '주인공들의 이름', '치즈', 그리고 '변화'였습니다.
이 세 주제어들이 어떤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을 평가하기 위해 하나의 문장으로 쓰도록 했지요.
'주인공들인 헴과 허는 치즈를 얻기 위해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도 이것을 생각하면 전율이 흐릅니다.
이 책을 가장 잘 요약한 최고의 문장이었니까요.
이런 방식은 대입시 논술반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었음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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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지저분하게 만들기
MT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책이 좀 지저분해져야 합니다.
빨간 볼펜으로 이 MT로 간주되는 어휘들을 동그라미로 표시해 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을수록 좋은 글쓰기를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집에서 읽을 도서를 정해주면 페이지 수부터 묻습니다.
책이 두꺼울수록 핵심어 파악이 힘들다는 오해 때문이었지요.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두꺼운 책일수록 MT를 찾기 쉽습니다.
제 경험상 그러합니다.
그 어떤 도서이든 핵심어는 1부 1장의 첫 문단에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왜 그럴까요?
작가들은 자신의 책 부피가 커질 경우, 독자들의 혼란을 걱정해서 책의 극초반부에 반드시 중심 키워드들을 나열하게 마련입니다.
소설이든 시든 혹은 어려운 철학 책이든 모두 같습니다.
예를 들어 카뮈의 <이방인>은 내용이 매우 난해하지만, 등장인물들이 구사하는 대화 가운데 '부조리'를 의미하는 여러 MT들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이런 핵심어를 발견하게 되면 소설 속의 인간 행동은 자연스럽게 규명됩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영재교육원에서 진행했던 수업 하나가 기억납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테마로 해서 진행했던 클래스였었죠.
총 7명의 고교생이 참여했었는데, 처음엔 학생 모두가 몹시 힘겨워했습니다.
무엇보다 학생들 사이의 학력 편차가 있었다는 점이 고민거리였습니다.
상호 토론이 되어야 글을 쓸 수 있는데 너무 신경이 쓰였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책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반복되는 단어에 원을 치게 했습니다.
위에 예시한 초등학교 중급반 경우처럼 말이죠.
하지만 방법론은 달랐습니다.
고교생들은 집에서 그 작업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목동 교육원에서는 글쓰기는 하지 않고 토론만 했습니다.
1시간 가까이 말이지요.
성과는 대단했습니다.
제가 따로 개념어나 정의들을 강의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을 정립해 나가더군요.
7명이서 얼마나 치열하게 논쟁을 하던지 제가 자주 끼어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작업이 습관화되면 책 제목만을 보고도 저작 동기와 책의 결론까지 추론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
메이저 텀(MT)는 책 읽기와 좋은 글쓰기의 연결 고리라는 것 말입니다.
이 링크를 잃어 버리게 되면 독서와 작문은 따로 놀게 됩니다.
마치 달리는 자동차의 구동축이 분리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의 논술 전략은 '모습을 자주 바꾸는 핵심어 잡아내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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