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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문명의 충돌

1. 과거와 현재의 문명(pp. 60-87를 중심으로)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15.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이희재 옮김 (김영사, 2016)

 

 

새뮤얼 헌팅턴은 인류사를 문명사로 단언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인류의 발전을  문명 아닌 다른 용어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써, 이런 그의 입장은 각 시대에 걸친 문명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폭넓은 자기 동일성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막스 베버 및 아놀드 토인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합의에 의해 도출된 문명의 개념적 정의는, 첫째, 단일 문명과 복수 문명의 구분을 전제로 한다. 헌팅턴에 의하면 도시와 문자를 기반으로 하는 서구 문명은 대체적으로 단일 문명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서구인들의 시각으로는 복수 문명은 비문명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런 그의 학문적 입장은 복수 문명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각각의 문명은 독자적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둘째, 문명은 문화적 실체로 간주된다. 물론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과학적 측면에 집중하는 문명’과 ‘예술 및 윤리적 측면에 관계된 문화’를 분리한다. 하지만 헌팅턴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문명과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 방식을 포함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고, 이런 차원에서 문명은 크게 쓰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문명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구성단위와 전체로서의 문명을 모두 포괄한다. 이런 점에서 문명은 지역 및 인종 등을 구별하는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성요소 및 형태가 변형됨은 물론 사람들의 문화는 서로 혼합되는 특징을 드러낸다. 넷째, 문명의 수명은 유한하긴 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된다. 왜냐하면 문명은 진화하고, 각 시대 상황에 잘 적응하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제국은 멸망해도 문명은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실체로서의 문명을 정치적 실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문명은 하나 이상의 정치적 단위를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문명이 진화하면서 정치 단위의 수나 성격에 영향을 줄 수 있기는 하다.

 

저자는 과거의 주요 문명과 현대의 주요 문명의 카테고리를 중화(中華), 일본, 힌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로 나누고 있다. 이런 분류는 지역적 특색과 함께 종교적 차별성이 크게 감안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문명과 문명 사이의 관계를 3개의 개념으로 대별하여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첫 번째 방법론은, ‘조우’(encounter)이다. 처음 문명이 등장하고 3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문명 사이의 접촉이 제한적이거나 간헐적이었는데, 헌팅턴에 의하면 ‘축 시대’(Axial Age)나 ‘전축 시대’(Pre-Axial Age) 의 조우는 ‘초월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의 구분 및 인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만 문명과 문명 사이의 극적인 접촉은 한 문명권의 사람들이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을 정복했을 때 발생한다. 이런 폭력적인 문명 간의 조우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고, 연속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오히려 주후 7세기 이후부터의 문명 접촉은 이슬람과 서구 그리고 이슬람과 인도 사이라는 비교적 유사한 문명권 내에서 강렬하고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두 번째는, 문명 간의 격돌이다. 헌팅턴은 이 충돌을 주후 11세기 이후 유럽의 기독교권, 즉 서구 문명의 부상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이해한다. 사실 당시의 서구 문명은 중국이나 이슬람권, 그리고 비잔틴에 비해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편이었지만, 주후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들 문명의 적절한 요소들을 서구인들이 가진 특수한 조건 및 이익에 부합하도록 결합시키면서 급격한 성장했다고 한다. 유럽 북부 및 동부의 기독교화로 촉진된 이 현상은 사회적 다원주의, 무역의 팽창, 그리고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대변되는15세기의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었고, 타 문명에 대한 서구 문명의 지속적이고도 일방적인 영향력 행사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런 문명 충돌의 결과로 인해 문명은 곧 서구 문명을 뜻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국제 체제는 문명 국가들과 이들이 지배하는 식민지들로 이루어진 베스트팔렌 체제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150년 동안의 서구 단일문명 내부의 대규모 종교 분열과 전쟁 등은 오히려 비서구 문화들로 하여금 창조성과 융통성, 그리고 개성을 강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끝으로, 다문명 체제 사이의 교섭이다. 헌팅턴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20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서구의 팽창은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문명 간의 관계는 문명 사이의 다각적인 교섭이 강하게 지속되는 단계로 전환되었다고 분석한다. 이는 곧 서구에 대한 복수 문명의 반항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아웃사이더로 간주되던 문명의 발전에 대하여 서구 문명이 대응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20세기 후반의 서구는 유럽과 북미의 2개 국가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점차 전투국가의 단계를 벗어나 보편국가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되기는 하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이런 분석 결과는 과거의 다극적 서구 체제가 이제는 양극적 준서구 체제에 그 주도권을 내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1990년대 이후 적어도 7개 이상의 복수문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문명 사이의 다양한 교섭의 유용성은 단선적 역사 – 문명을 고대 · 중세 · 근대로 단순히 구분하는 사관을 의미 - 의 허구를 다수의 강력한 문화들이 펼치는 드라마로 교체해야 한다고 보았던 슈펭글러 및 토인비, 그리고 브로델의 생각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사관은 과거의 서구 문명 중심의 학설들과는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한다. 즉, 유럽의 르네상스 이후 대두된 서구 단일 문명의 우월성에 바탕을 둔 학자들은 서구 이외의 문명을 마이너리티(Minority)로 폄하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복수 문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세계 전체의 문명을 통합하여 바라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단일 문명과 복수 문명 를 둘러싼 학자 사이의 충돌은 주로 ‘문명과 문화’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독일 같이 일찌기 기술이 발달한 국가에서는 아프리카 같은 후진국을 바라보았을 때 ‘미개한 나라’, 즉 비문명 국가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펭글러나 헌팅턴 같은 학자들은 기술 문명이 다소 쳐지는 지역에서도 엄연히 그들만의 생활 양식을 반영하는 문화가 있음을 역설하면서, 문명이란 다수의 광범위한 문화들을 포괄하는 총체적 문화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만일 이런 문명관이 옳다면 소수 인종이나 종교적 다양성이 문명의 범주 안에 편입될 가능성이 열려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크기 만큼 문명 간 갈등은 줄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 책이 발간되기 전인 1992년에 출판된『역사의 종말(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 Hukuyama)는 헌팅턴의 주장과는 상반된 문명관을 드러낸다. 사실 이런 논의는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의 도덕’과 관련되었기 보다는 ‘호불호(好不好)와 관련된 윤리’적 차원으로 이해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문명을 정의함에 있어, 딱 떨어지는 정답이란 있을 수 없고,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에 의한 취사선택일 뿐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아무튼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후쿠야먀는 자신의 책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개선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라고 선언한다. 어떻게 보면 독단적으로도 비쳐질 수 있는 그의 주장은 사실 두 가지의 철학적 담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저술한 『자유론』의 핵심인 ‘자유주의’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등장하는 ‘인정 투쟁’이다. 전자의 ‘자유’는 독재자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권력을 제한하는 것에, 그리고 후자의 ‘인정투쟁’은 누군가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근본적 욕망이라는 것에 그 철학적 분석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후쿠야마는 자유주의에서 개인의 권리 유지는 물론 독재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본 동시에 헤겔 스스로가 미국독립혁명을 인정투쟁의 결과물이라고 인정한 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미국의 독립혁명을 예로 들면서, 비록 미국의 독립이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성취되기는 했지만, 수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는 비폭력적인 합의를 통해 주인과 노예가 보편적인 평등 관계를 구축했다고 주장하면서 헤겔의 인정투쟁론을 사실상 부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후쿠야마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문명은  비폭력과 절차적 정당성, 그리고 합의를 통해 그 가치를 구축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완벽한 문명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역사는 종말 단계에 왔다고 단언하게 된다. 이런 그의 생각은 당연히 헌팅턴에 의해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서구 문명, 특히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시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였고, 수탈의 암흑시기이기도 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헌팅턴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문명 역시 불완전한 문명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류에서 소외되었던 제3의 문명들이 오히려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다고도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책의 보다 상세한 북리뷰를 통해 이 두 사람의 학문적 차이를 분석하고, 그에 따르는 새로운 세계관의 발굴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