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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문명의 충돌

3. 서구의 쇠퇴 - 세력, 문화, 그리고 토착화(pp. 131-165를 중심으로)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15.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이희재 옮김 (김영사, 2016)

 

새무얼 헌팅턴은 아래의 두 가지 이론을 인용하여 1990년대 중반의 서구문명을 진단하고 있다. 하나는,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세력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문명이나 지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 문명사관이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이른바 서구문명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는데, 경제성장의 저속화, 각종 사회적 병폐, 지역 패권국가의 등장으로 인한 군사적 균형 붕괴 등이 주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이 두 문명적 시각은 둘 다 정확한 분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구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것이며, 그 결과 각 지역의 핵심국을 중심으로 한 지역 단위 문명이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밀어낼 것이라는 것에 있다.

 

이런 서구의 쇠퇴가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라는 현상과 무관치 않다고 보았던 헌팅턴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서구의 몰락을 분석한다. 첫째는, 서구가 몰락하더라도 완만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몰락의 과정은 아래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증권시장의 곡선과 같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성취된다. 마지막으로, 서구 문명이 다른 문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량 – 경제, 군사, 제도, 인구, 그리고 기술 등의 우월성 – 이 20세기 초에 극에 달한 후, 다른 문명의 성장세에 밀려 하향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시각은 서구가 통치했던 영토의 축소, 인구의 감소, 생산력의 저하, 그리고 지역 패권국의 등장 등을 광범위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인용된 통계에 의하면, 서구 문명은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1920년에 정점을 찍고 1990년대 중반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

 

비서구권의 토착 문명, 즉 토착화는 위에 언급된 서구의 몰락과 긴밀한 함수관계를 가진다. 저자는 문화의 균형이 무너지는 주요 원인으로 힘의 판세가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달렸다고 보고 있다. 정복은 폭력적이지만 문화를 동반한다. 헌팅턴은 이것을 보편의 문명이 보편의 힘을 요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보면서, 19세기는 유럽의 식민주의 문명으로, 20세기는 미국의 초국가 제국주의 문명으로 대변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서구의 몰락과 함께 대두된 지역 맹주들의 등장으로 인해 토착화 및 비서구 문화의 부활은 이제 거스릴 수 없는 대세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의 부활 혹은 재이슬함화, 인도의 전 사회적 힌두화, 심지어 옛 소련 연방 지역에서의 슬라브화 모두가 이런 복수 문명의 부활에 대한 강력한 징조라고 하였다. 그는 이런 문명의 토착화는 민주주의에 내재된 역설에 의해 촉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민주화는 서구화와 갈등하게 되는데, 비서구권에서의 민주화가 대체적으로 인종 · 민족 · 종교 등을 아우르는 국수주의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권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민족주의자 혹은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고, 이런 성향으로 인해 이른바 ‘진보시대의 종언’과 함께 다양한 복수 문명들이 설 경쟁하고, 공존함은 물론 화해하는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이다.

 

한편, 헌팅턴에 의하면 서구의 몰락과 함께 이른바 ‘신의 설욕’ 혹은 ‘종교의 부활’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런 종교의 범세계적 부각이 아이러니하게도 근대화와 함께 종교의 쇠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비관론 속에서 그 싹을 틔었다고 분석한다. 급격한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가치의 붕괴와 함께 직업을 찾아 도시로 스며든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관계틀을 요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안정된 공동체를 희구하게 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새로운 도덕률을 원하게 된다. 이런 욕구의 종착점이 바로 종교의 부활 – 원리주의 종파는 비롯한 거의 모든 종교 – 이라는 것인데, 헌팅턴은 혼돈과 변화로 대변되는 급속한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종교가 신자에 부여하는 자기정체성의 확립은 지역 종교의 차원이 아닌 ‘지구촌 신앙 공동체로의 헌신’이라는 특징으로 발현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한국 기독교인의 급속한 증가나 유럽지역에서의 이슬람 교도의 팽창 등은 지역 종교가 약화되었을 때 타 종교가 그 자리를 대체한 사례라는 것이다. 만일 이런 그의 생각이 옳다면,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상대주의, 세속주의, 혹은 자기방종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종교의 강세 –특히 원리주의 성격이 강한 종교들 – 는 향후 문명의 토착화 현상과 맞물려 유교권 국가에서의 기독교화, 혹은 인도 및 유럽지역에서의 이슬람화 현상으로 더욱 표면화 될 것이고, 특히 비서구 종교의 부활은 비서구 사회에서의 반서구주의를 반증하는 증거라는 가설을 정립할 수 있게 된다.

 

 

서구의 대표적 미래학자라고 할 수 있는 앨빈 토플러는 그의 책 The third wave에서 문명 전환의 주요 원인을 극적인 산업구조의 전환에서 찾고 있다. 즉, 인류는 농경문명에서 산업문명, 그리고 제3의 물결인 미래 문명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산 및 이송 수단의 혁신적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현재를 바라보았을 때, 이 시점은 제4의 물결인 4차 산업혁명 시기로 이제 막 돌입했다고 할 수 있다. 토플러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여기에 헌팅턴의 생각을 대입해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생산수단을 독점 혹은 과점하는 문명세계가 산업구조를 변경해 왔고, 이런 역사의 굴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데에 있다. 헌팅턴은 서구 몰락의 주요 원인을 직접적인 통치 지역의 축소, 영어의 세계공용어로서의 기능 상실, 비서구 종교의 득세, 그리고 중국 및 인도로 대변되는 지역 패권국의 등장 등을 들고 있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서구 문명은 위에 열거된 하드웨어 측면에서의 패권적 지위는 상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 즉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압도적이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서구 문명의 한 축인 미국의 IT 기술 혁신은 GDP 경쟁자들인 일본, 독일, 그리고 중국 등의 추격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물론 중국의 경우에는 엄청난 인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경제성장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지만 현재는 부동산 버블 붕괴, 막대한 정부 및 민간 부채, 심한 빈부격차 등으로 인해 경제적 경착륙을 걱정하고 있다. 이 말은, 앞서 토플러가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이 미국처럼 압도적인 생산수단을 가질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이제는 미국이 유럽 문명을 대체하는 21세기 초국가 제국주의화 되어가고 있다는 가설을 가능케 한다.

 

새뮤얼 헌팅턴이 이 책을 저술할 당시 2020년 현재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문명의 충돌을 너무 현상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마치 후쿠야마가 구 소련 연방의 붕괴를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예단한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헌팅턴은 현상학적으로 드러난 결과를 분석한 자신의 이론을 가지고, 역시 시대적 격변 상황을 외피적으로 단순히 해석했던 후쿠야마의 학설을 비판한 것은 너무 성급했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 해석과 문명 해석은 거의 유사하다. 역사학자가 어떤 시각으로 시대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관(史觀)이 형성되고, 따라서 학자마다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학자 혹은 문화인류학자들 역시 이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맥락에서 차라리 문명의 진보를 혁신적 생산 수단의 변화로 보았던 토플러의 시각이 보다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몰락이라는 시각에서 후쿠야마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핵심적 증거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비서구 문명의 거센 도전에 있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중국의 국가사회주의 내지 이슬람 원리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마이너리티 문명의 성장과 함께 적어도 주류의 위치에서 밀려났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물론 수많은 역사적 자료와 고증을 통해 이론적 논거가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역사나 문명의 해석은 미시적 방법론보다는 거시적 방법론에 의해 규명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앨빈 토플러의 모델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문명의 충돌』은 얼핏 보면 거시적 분야들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지역 문명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문명을 관찰하는 데에 있어 두 가지 렌즈를 동시에 사용하게 되면 해석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 후쿠야마가 말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완전한 승리와 그로 인한 역사의 종말이 역사적 오류로 판명되었듯이 헌팅턴의 복수문명론 역시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화 시대에 있어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고 보여진다. 단적으로 말해, 헌팅턴 문명사관이 핵심인 ‘문명의 충돌’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관점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플러가 전 지구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혁신적 생산 수단의 변화를 문명의 전환기로 규정했던 것처럼, 종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색을 초월하는 전 지구적인 변화, 즉 글로벌 패러다임의 전환의 촉매제는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일 역시 매우 의미있는 학문적 작업이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