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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문명의 충돌

2. 보편 문명, 근대화와 서구화(pp. 88-127를 중심으로)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15.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이희재 옮김 (김영사, 2016)

 

헌팅턴은 인류 전체의 문화적 공통성을 드러내는 가치관, 믿음, 관습, 그리고 제도 등을 인류 전체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보편 문명관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이런 그의 생각은, 기존의 보편 문명관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근본적 가치나 제도 등을 다루는 인간 행동의 상수(常數)는 해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 행동의 변화로 발생하는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또한, “인류는 단일한 세계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밑’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문화, 민족, 종교, 역사적 전통 등으로 형성된 수많은 다양한 복수 문명들의 면모를 가리고 있는 ‘얇은 베니어판’ 같다”고 주장한 하벨의 이론적 토대 역시 그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현 시대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단일 보편 문명의 주류로 간주되는 ‘다보스 포럼’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우리가 아는 것만큼 많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헌텅턴의 논조는 사실상 진보된 서구 문명의 가치관이나 원칙들이 과대포장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보스 포럼에 속한 서구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보편 문명 혹은 보편 문화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현재의 서구의 소비 양식이나 대중 문화, 특히 미디어의 우월성에 기초한 보편 문명관은 오히려 과거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한때의 유행으로 간주된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이가 서구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비서구 사회의 자국 문화의 건강한 생존을 자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서구인 시각으로 바라본 단일 보편 문명의 근거인 보편 언어 및 보편 종교의 영역 역시 헌팅턴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어가 세계의 언어’라는 주장은 언어의 보급률 차원에서 바라보아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통계에 의하면, 5대 서구어 비율은 갈수록 감소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92%가 영어 사용에 대해 불편해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의미에서 영어는 보편 문명의 증거라기 보다는 과거 미터법이 사물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채택되었던 것처럼 이질적 문화와 문화 사이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이해될 여지가 분명히 있다. 한편, 그는 보편 언어의 출현 가능성이 낮은 것처럼 종교 역시 그러하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각 지역의 종교적 자각, 원리주의 운동 등의 출현으로 종교적 차이만 심해졌다고 한다. 추정치이긴 하지만 2025년에 이르게 되면 이슬람 교도의 숫자가 세계 인구의 30%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기독교의보편 종교적 근거가 상실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서구 보편 문명의 근거는 이른바 ‘백인의 책무’라는 관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아울러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승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이에 더해 갈수록 지구촌화 되고 있는 글로벌 환경 역시 보편 문명의 도래를 예견하기는 하지만, 헌팅턴은 이런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반드시 평화나 유대감을 조성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런 세계화 추세 속에서도 문명적, 사회적, 그리고 민족적 자의식이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함으로써 세계를 ‘단일한 장소’로 보는 견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드러낸다. 또한, 서구 문명을 근거짓는 중요한 잣대 중의 하나가 바로 보편 문명을 18세기 이후 이루어지고 있는 광범위한 근대화 과정의 결과물로 이해하는 것인데, 헌팅턴은 이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즉, 근대사회와 전통사회 사이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문화를 가졌던 사회들 간의 유사성이 근대사회 사회들 사이보다 낮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사회의 교류가 과거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각 지역 사이의 공통성이 증가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들 사이의 유사성 혹은 동질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헌팅턴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근대 문명은 서구 문명이며, 서구 문명은 곧 근대 문명'이라는 공식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서구가 자신들과 세계를  그리스-로마의 유산, 기독교적 자산들, 유럽의 언어들, 종교와 세속 권력의 분리, 법치 및 대의제, 개인주의, 그리고 사회적 다원주의라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요인들을 결합해 근대화를 이끈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팽창은 서구는 물론 비서구 지역의 근대화를 자극했다고 볼 수 있는데, 저자에 의하면 비서구 사회의 리더들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고 한다. 첫째는, 근대화 및 서구화를 모두 거부하는 쇄국의 길이다. 16세기부터 19세기 중반의 일본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 이 형태는 20세기 말에 들어서서 순수고립주의, 즉 극단적 원리주의로 남아 있지만 세계의 지구촌화로 인해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둘째는, 근대화와 서구화를 모두 받아들이는 ‘케말주의’ 혹은 ‘헤롯주의’를 들 수 있다. 비근대적 토착 문화의 제거는 물론 고유 언어의 포기 등을 포함하는 이 형태는 터키의 근대화를 이끈 정치인으로 평가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헌텅턴은 이런 케이스를 채택한 나라 대부분은 국론 분열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세째로, 어느 사회가 간직한 고유 문화의 중심적 가치, 관습, 그리고 제도 등을 지키면서 근대화의 길을 걷겠다는 제3의 선택, 즉 개량주의가 있다. 쇄국주의와 파괴적 문명 통합 방법론으로서의 케말주의에 대한 위험을 간파한 비서구 정치인들과 지성인 대부분이 이 형태를 선호한다. 근대 중국의 청나라가 내세웠던 ‘중체서용(中體西用)’ 및 현대의 중국 당국이 펼치는 다양한 정책들이 이에 대한 대표적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유형 역시 일방적인 서구화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 요인이 있지만 그나마 위의 세 형태 중에서 비서구권 국가들이 채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새무얼 헌팅턴은 다양한 문명 세계를 다룬 이 책의 1부를 마무리 지으면서 "결국 근대화는 반드시 서구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비서구 사회는 자기의 고유문화를 포기하지 않고도, 서구의 가치나 제도 등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채로 근대화를 이루었다…서구화를 가로막는 비서구 사회의 문화 요소에 비하면, 근대화를 가로막는 비서구 사회의 요소는 극히 작은 양이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런 그의 생각은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종교적 도그마가 이슬람권의 근대화를 가로막을 것이라는 예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문명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의 통합된 보편 문명이어야만 한다는 것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류가 단일 보편 문명을 추구하면 할수록 전쟁과 수탈을 조장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게 되는데, 제국주의 및 전체주의가 모두 서구 지역에 비롯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주장이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지난 번 서평에서 언급된 바 있는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등장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의 종말’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생각은 ‘자유 경쟁’ 및 ‘자본 축적’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전 지구를 아우르는 최종적 보편 문명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최근의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그의 이런 ‘종말적 역사관’을 단정짓기에는 조금 섣부르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헤겔과 막스에 의해 역사의 완성으로 간주되었던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후쿠야마의 사상 역시 수많은 변수에 의해 그 불완전성이 입증되고 있고, 따라서 자유민주주의가 ‘완성되고 있다’는 말은 가능해도 ‘완성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유민주주의의 큰 특징으로 평가되는 ‘시장의 무한한 방임성’에 대한 비판이 증대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70년대에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최근 들어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논문들이 최근 많이 등장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국가 권력이 개입을 정당화한 신자유주의가 오히려 시장의 유연성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다 최근 자유민주주의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극단적인 ‘America First’ 정책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형태가 어디까지 변형될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후쿠야마의 이론은 서구적 가치에 입각한 단일 문명론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이런 측면에서 헌팅턴의 복수 문명론과는 일정한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