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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기술

4. 좋은 문패달기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19.

글쓰기에서는 글의 번지수를 먼저 반드시 밝혀야 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한 선배가 있다.

이 분은 노래방에 가기만 하면 주위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특정한 한 곡만 불러대던 특이한 사람이었다.

바로 <번지 없는 주막>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번지 없는 주막>이 낭만이 될지 몰라도 글쓰기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글의 번지수는 곧 글의 문패다.

글의 목차 혹은 차례라고 불리우는 것들이 바로 이것인데, 10페이지 이상 되는 소논문은 반 페이지 가량의 팻말을 반드시 달아야 한다.

스크롤 바를 여러 번 아래로 내려야 하는 장문의 블로그 글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게 독자들을 위한 성의다.

물론 1-2페이지짜리 습작이나 글쓰기 숙제는 해당이 안 된다.

이런 짧은 글에서는 명료한 토픽과 각 문단의 첫 문장, 즉 소주제문 사이의 연관성이 중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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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글에 있어서의 문패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을까.

당신의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글의 구조를 사전에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글의 목차를 아주 쉽게 본다는 데에 있다.

천만의 말씀, 해 본 사람만이 안다.

이에 관련한 웃고픈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필자의 대학원 시절, 페이퍼 작성에 힘겨워하던 후배는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표지에 리본을 달거나 형형색색의 컬러 용지를 사용했다.

심지어 5페이지 한도인 과제물도 30페이지로 만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물량 공세에 지친 교수님이 "OO야, 제발 이번엔 4페이지로 만들어라. 안 그러면 학점 없다!"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이런 경고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마지막 발제 일에 용케 규정은 지켰는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4페이지 글쓰기의 서론을 '들어가는 말', 본론을 '펼치는 말', 그리고 결론을 '나가는 말'로 꾸며 놓은 것이다.

대학원 과정에서의 4쪽 소논문은 그냥 에세이다.

부담 없는 일종의 글쓰기 습작인 셈이다.

그 페이퍼를 본 교수님 왈, "OO군, '집을 나간 글'은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냐?"라고 하셔서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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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후배가 작성한 글의 구조에서의 약점은 문패가 문짝보다 크다는 데에 있다.

배보다 배꼽이 커서야 사람 대우받기 어려운 이치와 같다.

여러분의 글이 비교적 길다고 생각이 되면 첫 페이지의 상단에 간단한 목차를 달아라.

달되 잘 달아야 한다.

글의 기승전결이라는기본 구조 원칙은 글의 길이와 아무 상관이 없다.

심지어 한 문단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될 때가 있다.

글의 목차 혹은 차례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어느 선배는 9학기가 넘도록 논문을 마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논문 목차 구성이 미비했던 결과였다.

교수님들이 계속해서 목차에 문제가 있다고 딴지를 거는 바람에 박사 과정을 6년 6개월 만에 마쳤다.

이만큼 글의 문패를 다는 일이 중요하다.

긴 글은 글의 일관성을 조명해 주는 조화롭고 명료한 목차가, 짧은 글은 대주제문과 소주제문 사이의 관련성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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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보나 영풍문고에 가서 책을 고를 때 항상 목차부터 먼저 보는 습관이 있다.

심지어 시집을 고를 때도 그렇다.

다음으로 읽는 것이 머리말이다.

목차의 흐름이 짜임새 있게 구성된 책은 틀림없이 좋은 내용으로 채워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온라인 기반의 글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내용 파악을 위해 스크롤 바를 자주 위로 아래로 내려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할 독자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K교수님이 있다.

위에 언급한 4페이지 리포트를 발표하는 날은 항상 공포 분위기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 페이지 첫 문단의 첫 3문장에서 대부분 발표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목차가 없는 짧은 글의 함정에 그 때의 학생 모두가 빠져 버린 결과였다.

문패에도 좋고 나쁨이 있다.

장문이든 단문이든 문패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이 글쓰기의 절대 명제를 우리 모두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