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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별곡

1. 괴나리 봇짐 세 개 들고 뉴욕으로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24.

2005년 6월 21일 오전 11시 인천공항 국제선 출국장 앞.

초여름의 열기가 제법 달궈지던 그런 날이었다.

거기서 나는 아내와 다소간 멋적은 이별을 고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있는 포옹도 하지 못한 채로, 그냥 "우리 나중에 봐, 늘 건강하고 아이들 부탁해"라고만 했다.

내가 너무 태연한 채로 말을 했을까.

아내도 수줍은 미소로 "네, 저희들 걱정마세요"라며 대답이 짧다.

우린 서로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연인들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그냥 말없이 앞만 보고 걷는다.

그때 청사 안에 항공편 안내를 알리는 요란한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내가 타야 할 비행기다.

우린 그제서야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여보, 빨리 짐 챙겨~~~"

난 아침 7시부터 서둘렀다.

아내는 가장을 먼 나라로 보내는 것이 못내 불안했으리라.

아침부터 남편을 위해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했다.

소소한 간식거리까지 챙기는게 영락없는 한국 아줌마다.

아침 잠이 덜깬 두 아이는 아빠와 전에 없던 포옹을 하고 나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행랑 2개와 대학생용 멜빵 가방 하나를 챙겨 어깨에 짊어지고 아내와 함께 집을 총총히 나섰다.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우리는 그만 공항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게다가 공항으로 가는 방향까지 잃어버렸다.

서둘러 나오느라 인터넷으로 예매한 티켓을 집에 놓고 나와 집으로 되돌아 가는 바람에 더욱 시간이 촉박해졌다.

다들 출근으로 바쁜 신촌오거리에서 난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빨리 빨리 서둘렀어야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본다.

 

천신만고 끝에 인천공항행 버스를 탄 나는 아내에게 괜히 미안하다.

'이런 성질머리하구선...' 후회를 해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힐끗 옆자리에 앉은 마누라를 쳐다 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인다.

너무 큰 짐을 맡기고 떠나는 것은 아닌지...내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속으로 자책하며, 아내의 작은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하지만 난 웃을 수가 없다.

다시 얼굴을 돌려 버스 차창 밖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늘상 보던 풍경인데 이상하게 낯설다.

마치 이 길을 다시 못 볼 사람처럼, 나는 공항도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내의 손을 꼼지락거리며 놓지 않았다.

 

한 달 전 담석증으로 제법 큰 수술을 받았던 남편이 걱정되었나 보다.

아내가 나에게 묻는다.

"배 통증은 이제 없어요? 고공에서 괜찮을까요?"

일부러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이 곧 있을 이별을 예고하는 듯하다.

사실 그녀는 의사가 장거리 여행이 괜찮다고는 했지만 비행기 티켓팅을 하는 순간부터 내내 잔소리를 했었다.

수술 받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너무 급하게 서두른다고 말이다.

미국에서 날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배를 퉁퉁치며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는 날 보고 아내는 헛웃음을 짓는다.

이러는 사이에 거대한 인천공항이 이제 바로 눈 앞으로 다가왔다.

 

출국심사장에 들어선 나는 아내를 향해 그만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내는 이런 무심한 나를 계속 바라보기만 하며 입을 손으로 가린다.

알았다고 고개를 위아래로 젓는다,

몸수색을 마친 나는 비행기 티켓에 찍혀있는 탑승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혹시나 해서 몸을 돌이켜 보니 저 멀리 아내의 조그마한 얼굴이 나를 빼꼼히 바라보고 있다.

참 고마운 사람.

탑승장 가는 길 좌우에 늘어선 면세점의 화려한 상품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웬지 발걸음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다.

여행 목적이 아닌 탓이리라.

괜시리 마음을 다잡는다.

 

잠시 후, 내가 탈 비행기 탑승구에 사람들이 늘어서는 것이 보인다.

아직 탑승 30분전인데도 다들 마음이 바쁜가보다.

뭐가 그리들 좋은지 입들이 전부 귀에 걸렸다.

기분 탓일까, 나만 심각해 보인다.

거대한 창문 밖으로 보이는 태극마크가 선명한 대한항공 여객기는 나에게 너무나 압도적이다.

가장 먼 비행기 여행이 부산이었던 나는 이 장거리 여행이 가져다 줄 여파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설레기는 커녕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단정한 모습의 승무원들이 내 좌석을 안내해주었고, 난 어느 조그마한 체구의 외국인 노부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여객기는 굉음을 울리며 솟구쳐 오르기 위해 엔진을 가열하기 시작했고, 난 곧 두손을 모았다.

 

아내와 함께 출국 몇 달 전부터 기도했던 내용 그대로 말이다.

"하나님, 한국을 떠납니다.

전 두 가지 만을 가지고 미국으로 향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가족 사랑의 힘,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떠납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니, 까만 피부에 흰 눈동자가 돋보이는 할아버지가 신기한 듯 왼고개를하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음을 건넨다.

긴장한 나의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비쳐지고 있었다.

자격지심일까, 그가 참 작아보인다.

 

 

문득 반 년 전 일이 떠오른다.

청운동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불가마 찜질방에 네 친구가 모였었다.

연말이라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뭉치면 가족 모두가 이해해 주는 그런 벗들이었다.

온 거리엔 징글벨 소리가 요란했고, 서울시청 앞 광장 트리가 유난히 반짝이던 그런 날이었다.

레일을 막 타고 나오는 거대한 숯가마를 등에 대고 한 친구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야, 요즘 우리 모임에 가 보면 말야, 미국에 아이들 유학 안 보낸 친구들이 없더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 아이가 이제 막 중학교 2학년,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 하나가 나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근데 말야, 중학교 2학년이 마지노선이래. 그 이후에 가면 영어 때문에 다 포기한다고 하더라고."

 

그때 난 소위 잘 나가는 논술 강사이자 현직 목회자였다.

이 두 개의 직업이 가지는 특성은 상극이다.

어느 한 쪽에 올인할 수 없는 아주 어정쩡한 그런 상태가 지속되던 생활이었다.

목회자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어 연세대 대학원에서 만난 한 선배가 우연히 소개해 준 영재교육원 논술 강사 자리.

여의도와 목동을 거쳐 대치동까지 수많은 강의를 하면서 보람과 갈등을 동시에 느끼며 살았던 그 시절이었다.

좁기만 했던 사고의 외연이 확장되는 정말 귀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수입 역시 박봉이었던 교회 사례에 비해 월등했다.

생활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아이들만 미국으로 보낼 수는 없는 그런 형편임은 분명했다.

상대적으로 수입이 나아진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날의 불가마 미팅은 나에게 던져진 초대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목회할 기회가 생긴 터라 금상첨화였다.

'가자, 가족 모두. 까짓거 한번 해 보자구.'

 

인천공항을 선회한 여객기는 이제 망망대해로 진입했다.

동해인지 서해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어찌나 나의 형편과 비슷한지 괜히 눈가가 축축해진다.

바지 왼주머니에는 제법 두툼한 지갑이 들어 있다.

아내가 어제 외환은행에서 환전해서 내 손에 꼭 쥐어준 1,500불.

손을 가만히 넣어 다시 느껴본다.

나를 지도했던 어느 교수님 한 분이 미국 유학을 오르며 가져 갔다는 100불을 회상하며 그나마 안심이 된다.

나도 모르게 자꾸 비행기 후미를 바라본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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