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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별곡

2. Welcome to New York.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24.

2005년 6월 21일,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는 JFK 공항 근처를 날고 있다.

태양과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창밖의 태양이 눈부시다.

대서양과 맞닿아 있는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말로만 듣던 뉴욕이다.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내가 큰 일을 저질러도 아주 큰 일을 저질렀다는 느낌이 조금씩 밀려온다.

'한국을 떠날 때에도 6월 21일이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거대한 비행기가 갑자기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꾸구웅~~~~~~~~~~꿍.'

첫 장거리 비행에 지친 나였지만, 거친 착륙 마찰음에 섬뜩한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잠시 내 몸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런 요동이 오히려 입국심사를 앞둔 나의 산만한 마음을 정리해준다.

 

그해 여름은 출국 문제로 참으로 바빴다.

첫 해외여행이 하필 미국이어서 그만큼 신경쓸 일이 많았다.

여권을 구청에 신청하는 과정과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여러 다큐멘트를 꾸며야 했던 일들.

뭔 요구 서류가 그리 많은지, '다른 사람들도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에 가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미 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를 받기 위해 1시간 가까이 줄을 서고 기다리면서 엄청 놀랐었다.

'이렇게 긴 줄이라니...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이런 불편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 속에 내가 끼어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리고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더랬다.

무엇보다 여자 영사 앞에서 짧은 인터뷰를 하며 긴장했던 그 순간.

불과 3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힘들기는 했지만 그 어떤 과정에서도 클레임이 걸리지 않기는 했다.

그걸 아내가 참 신기해 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비행기가 멈춰선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고요했던 기내가 부산스러우니 오히려 번잡했던 생각들이 떨쳐 나가는 듯하다.

착륙 직전 승무원이 기내 방송을 통해 입국 서류를 잘 챙기라는 멘트가 기억났다.

나는 입국 신고서가 들어 있는 여권을 오른손에 꼭 움켜쥐었다.

그리곤 오른쪽에 앉아있던 스리랑카 노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Good luck."

내가 미국에 도착해 처음 구사한 영어였다.

해맑게 감사 인사를 하는 그들이 왜 그렇게 부러웠던지.

'이 사람들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보네...'

장시간의 비행 속에서 몸짓 발짓으로 소통하며 잠시 친구가 되어 주었던 친절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사돈의 팔촌은 커녕 나를 초청해 준 목사님 딱 한 가정만 믿고 떠난 이 길.

그들의 꾸부정한 허리가 왜 그렇게 단단해 보이는지.

 

 

누군가가 그랬다.

미국 입국 심사는 비행기 좌석 순으로 결정된다고.

난 비행기 꼬리 부분에 앉았던 관계로 이미 각오는 했다.

예상대로 1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겨우 내 순서가 되었다.

10여 개의 부스로 구성된 입국 심사대 왼편에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를 위한 심사장이 따로 있었다.

그들은 아주 빨리 그곳을 통과한다.

괜시리 그들이 부럽다.

아주 엄격해 보이는 한 백인 심사관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는 이런 일을 오래 해서인지 무심한 얼굴이다.

'Good afternoon. Sir' 미국에서의 두 번째 영어회화를 구사한다.

힐끗 날 쳐다본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민다.

항공티켓과 비자, 그리고 입국심사서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항공권을 보지도 않고 되돌려준다.

나는 속으로 '아니 어느 인간이 나에게 꼭 6개월짜리 왕복항공권을 사야한다고 한거야'라고 투덜거린다.

입국 심사관이 엄지를 내밀라고 한다.

지문을 채취했다.

이렇게 강원도 태생 촌놈이 드디어 세계의 심장 뉴욕에 입성하도록 허락되었다.

 

'형님. 많이 기다리셨죠?'

나를 위해 R 목사님은 40분 넘게 JFK 공항 로비에서 서성거리신 것 같았다.

너무 미안했다.

계면쩍어 하는 나를 위해 목사님은 "미국에 온걸 환영하네"라고 반겨 주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라며 궁금해 하신다.

"네, 형님, 비행기 꼬랑지에 앉은 죄로!"

목사님이 파안대소 하신다.

내가 긴장하지 않은 증거라며, 미국에 잘 적응할 것 같다며 내 어깨를 툭 치신다.

그 사이에 형님은 아메리칸 스타일로 많이 바뀌신 듯하다.

오른손엔 아메리카노, 가벼운 티셔츠엔 알 수 없는 영문이 가득하다.

앞서 걸으시며 "Come on!"하시는 제스처가 아주 세련되어 보인다.

 

1년 전이었던가.

미국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이메일 하나가 날라왔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R 목사님께로부터 말이다.

강서구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며 박사과정 막바지를 달리던 분이셨다.

그러다 홀연히 교정에서 사라져버려 모두가 궁금해 했던 바로 그 분.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던 그 목사님의 이메일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미국에 와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이다.

평생 미국 갈 일은 없을거라고 확신했던 내 생각이 이 때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수직과 박사 학위 모두를 발로 차버리고 그 곳으로 가신 분의 이야기라 마냥 소홀히 여길 수 없었다.

그런 기득권들을 포기할 정도로 미국에서의 목회가 그렇게 대단할까 싶었다.

이미 보직교수였던 그가 10년 만 더 버티면 총장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 보았다.

아내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예상했던 대로다.

"한번 생각은 해보세요..."

돌아 온 대답이 참 형식적이다.

하기는 생전 미국에 가 보고 싶다고 얘기를 꺼낸 적이 전혀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내는 나를 잘 안다.

한번 마음 먹으면 끝장을 보는 내 성격을 말이다.

그녀는 지금 내 속마음이 활활 붙타오르지 않도록 리액션을 매우 조심하고 있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집안 형편이 또 한번의 풍파를 겪지 않을까 하는 그 심정을 내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무슨 결정을 하면 날 지지해 주었던 그녀라서 내심 안심은 된다.

 

나 역시 R 목사님의 전철을 밟으려면 안정된 직장과 학위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점이 걸리긴 했다.

학위를 마치기만 하면 교수로 임용할 수 있다는 교단 어르신들의 달콤한 유혹도 그렇고.

외국 박사 학위를 가진 선배들도 시간 강사 노릇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그 말을 믿을 내가 아니긴 했지만 솔깃하긴 했었다.

무엇보다 동료 목회자들과 친구들은 모두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남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학교를 제 발로 그만둔다니 제 정신이 아니라나 뭐라나.

환송연 비슷한 모임에서도 벗들은 정말 가냐고 긴가민가 했었다.

영재교육원 원장 역시 너무 무리한 시도라고 만류했다.

그 역시 자녀를 미국에 유학보냈었던 경험을 주저리주저리 나열하며 날 설득했다.

정말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 강의가 펑크날 것이 두려워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저런 고민 끝에 6개월 정도 이른바 냉각기를 갖기로 했었는데...

세검정 불가마 미팅이 이런 무모한(?) 시도를 감행토록 불을 지핀 격이 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 손가방을 뺏다시피 하며 형님이 빙그레 웃으신다.

나는 속마음이 들킨 기분이 들어 괜히 씨익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아내와 애들이 좀 염려가 되어서요."

특히 아빠를 잘 따르던 딸이 예민한 중 2라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네나 걱정해~ 아이들은 어디에 갖다놔도 잘 적응하니까 말야!"

이분은 지금 미국에 도착도 하지 않은 식구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 낙관적인 분이시다.

문득 '뭐든지 물어보라'는 네이버 블로그의 어느 글에서 슬쩍 본 한 구절이 떠오른다.

'미국에 도착하면, 당신을 맞아주는 사람의 직업이 너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이 공항주차장 게이트를 막 벗어나시면서, 나에게 한마디를 툭 건네신다.

"자네, 미국에서 무엇으로 먹고 살건가?"

그때 플러싱 한인촌 진입로인 노던 블러버드 도로변에 이런 광고판이 하나 보인다.

 'Just you can do it.'

 글쎄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서인가 갑자가 배가 허기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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