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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별곡

6. 유일한 피붙이와의 상봉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24.

2005년 8월 22일. 
우리 가족은 지금 워싱턴 D.C.로 향하고 있다. 
미국 땅에서 단 하나의 혈육이 살고 있는 그곳으로 말이다.

유미는 아내의 외사촌 동생이다. 
아내와 내가 연애할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꼬맹이가 미국으로 시집와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지난 주부터 계속해서 아내와 연락하더니 결국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녀의 집은 워싱턴DC 북쪽에 위치해 있는 메릴랜드 몽고메리 카운티에 있다고 했다.

유미는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한 집에 살고 있다.

과연 그 분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좀 겁이 나기도 한다. 
플러싱에서 만났던 한인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던 아내가 더 걱정이 된다.

남이야 '에이 얼굴 안 보면 되지 뭐~'라고 하면 되겠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차창밖의 경치가 눈에 콕 박히지 않는다.

 

아직 승용차가 없는 우린 맨해튼에서 대중교통, 즉 버스를 타기로 했다.

딸과 아들에게 뉴욕의 지하철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해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난 이미 가족의 반응이 어떠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이 이 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한 달 내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온 사방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중국인 집성촌이 있는 곳으로 지하철을 환승하기 위해 타임 스퀘어가 있는 42번가 플랫폼에 들어서는 순간.

딸이 놀란 소리를 냅다 지른다.

"아빠, 저거 뭐야? 쥐 가족이야?"

역 구내로 막 진입하는 차량 불빛에 선명히 비치는 쥐 7마리.

일렬 종대로 아주 일사불란하다.

하지만 뉴요커 그 누구도 이 장면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 없다.

그들에겐 그저 일상일 뿐이다.

20세기 초 당시의 타일이 아직도 붙어 있는 벽은 때가 쩔어서 본래의 색을 찾기 어렵다.

외부로 어지럽게 돌출된 전기 배선은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힌다.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H빔은 녹이 슬어 페인트로 덕지덕지 덧칠을 한 탓에 진녹색의 칙칙함이 돋보인다.

낮은 천장과 어두운 형광등 조명으로 인해 동굴에 서 있다는 느낌은 덤이다.

방금 쥐 가족이 횡단한 철로변에는 365일 항상 물이 흥건히 괴어 있다.

정말 낡아빠진 벤치에는 노숙자들이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새우잠을 자고 있다.

"OO야, 이래 뵈도 이 지하철이 뉴욕의 심장 타임 스퀘어 밑에 있고, 100년의 역사란다~"

궁색한 나의 변명에 딸은 관심 1도 없다.

그저 내 손을 꼬옥 쥐고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래, 지하철 꼬라지는 이래도 달나라에 우주선 보냈고, 우주왕복선을 운영하는 세계 최강국이 바로 미국이지...'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해본다.

 

다른 노선 열차가 몇 개 지나가더니 드디어 3번 노선 차량이 구내로 진입한다.

막 출근 시간이 끝난 시간대여서 다행스럽게 승객은 많지 않다.

네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딸이 또 불평이다.

"아빠...맞은편 사람 무릎이 발에 닿을 것 같아..."

사실이다.

뉴욕 지하철은 차량 복도가 정말 좁다.

어느 롱다리 흑인이 다리를 꼬고 앉았는데, 때 묻은 나이키 운동화가 내 앞에서 흔들거린다.

한국에서 깨끗하고 쾌적한 지하철만 타고 다니던 아이들이라 적응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데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냄새와 소음 그리고 낙서다.

차량 바퀴 마찰음은 한국의 5배 정도는 족히 되고, 뉴요커들 특유의 하이톤 보이스가 끊임없이 실내를 공명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유리창과 광고판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사실 안락함과는 거리가 있는 공간이다.

이럴 땐 그저 눈을 꾹 감고 흔들리는 열차에 몸에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아이들은 열차가 정거장에 설 때마다 계속 내게 질문을 해댄다.

"아빠, 언제 내려?"

 

우여곡절 끝에 중국인 집성촌인 맨해튼 차이나타운에 도착했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티켓에 인쇄된 주소를 계속 확인하며 물어물어 경우 목적지를 찾았다.

물론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같은 멋드러진 건물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표지판이나 버스 계류장이 보이지 않는다.

당황해 하는 나를 저편에서 바라보던 눈치 빠른 조그마한 체구의 중국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

외계어같은 중국식 영어를 내게 던지며 손을 연신 흔든다.
맨해튼 브리지 근처에 있는 차이나타운에는 없는 게 없다. 
200년 가까이된 중국 이민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물이 바로 이 다리다. 
이 고딕 양식의 철교를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민 초기의 중국인들이 희생되었는지 모른다. 
당시 뉴욕시 당국자가 그들에게 그 댓가로 어느 지역에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들은 조상들의 혼이 담겨있는 맨해튼 브리지 근처에 모여 살기로 결정했다고 하는 데 정확하지 않다.
차이나타운 입구에 그들의 조상을 기념하는 공원과 기념물들이 많다. 
바로 이곳에서 미국 동부지역을 다양하게 잇는 저렴한 관광버스들이 들락거린다. 
우리 가족은 1인당 왕복 30불씩 4장, 이렇게 총 120불을 지불하고 간단하게 워싱턴 왕복여행권을 확보했다. 
싸긴 하지만 이 왕복권에는 보험이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사고가 나면 모든 책임은 개인이 져야 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쳤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으니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된다.
버스가 신나게 뉴저지 턴파이크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편도 5시간의 장거리 여행이 시작되었다.

델라웨어를 지나 메릴랜드주 볼티모어를 거쳐 드디어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근처에 있는 워싱턴 D.C.차이나타운에 우리 가족은 무사하게 도착했다.

 

 


"엄마, 아빠 이 싸람틀 너무 너무 나이스 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성재와 수재.

제 엄마 유미를 빼다 닮은 녀석들이다.
혀 꼬부라진 한국말로 우리 가족에 대한 평가를 아주 대놓고 내린다.

그리고선 우리를 향해 씨익 웃는다.

깊게 패인 보조개가 앙증맞다.
사실 아이들의 잣대는 냉정하다.
그들은 싫은 것을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좋은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느끼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존재다.
이 말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유미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의 웃음이 스쳐 지나간다.
나도 아내도 안심이 된다.
시부모님은 물론 남편 역시 생전 처음 낯설은 처갓쪽의 친지 방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분들도 나름 긴장을 하셨을 텐데, 아이들의 평가를 통해 우린 일단 점수(?)를 좀 얻은 결과가 되었다.

"언니.... 하루만 더 자고 가라... 응?"

"나도 그러고 싶은데...애들 학교 문제 때문에 가봐야 해..."

주방에서 유미와 아내가 목소리를 낮춘 채 소근거린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미 그녀의 시부모님은 출근하고 집에 계시지 않는다.
우리가 피곤할 테니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단다.
나는 이미 그 전날 하룻밤만 자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을 했기에 유미는 그 아쉬움을 달래지 못하는 눈치다.
괜시리 고맙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진한 가족애를 표현해주는 그녀가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드넓은 미국에서 그래도 우리 가족은 혼자가 아니구나...

우다당탕~ 우당탕.

거실 한켠에서 유미의 아들들과 우리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있다.

특히 수재는 아주 러블리한 꼬마다.

외부인이 하룻밤 자고 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더니...

이 녀석이 아주 신바람이 났다.

딸과 아들이 레고 블럭을 가지고 와서 맞춰 달라는 성재와 머리를 맞대고 인상을 쓴다.

뭐가 잘 안 맞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유미는 마음이 심란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 시부모님께 말씀을 드렸고, 뉴욕에서의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에 어쩔 수 없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려고 온 가족이 아침 산책을 하기로 했다. 
마침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콘도 단지 내엔 깔끔한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잘 되었다 싶어 유미와 테니스를 한참을 쳤다.

땀을 흘리고 나니 잡념이 사라진다.

애들을 놀이터에 풀어 놓고 벤치에 앉아 간식을 나누고 있노라니, 산들바람이 콧잔등을 간지럽힌다. 
아...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이다.
눈부신 햇살과 아이들의 따뜻한 웃음소리.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있어서 아쉬움은 덜하다.
유미의 시어머님께서는 우리 가족을 위해 정성스러운 점심 보따리를 선물로 남겨 주셨다.
워싱턴 D.C. 시내와 연결되는 전철역까지 우리 가족을 바래다주는 유미.
그녀는 표를 끊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우리 가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심장 저 밑바닥에서부터 북받쳐 오른다.
"언니, 버스 타면 꼭 전화해~~~."
그녀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그녀의 모습을 대신한다.
마주 손을 흔들던 아내의 손이 자꾸 눈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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