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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별곡

8. 헤이, 아 유 차이니스?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24.

뉴욕에 도착한 지 2개월.

드디어 우리 가족은 퀸즈 한인타운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 다든 곳이라 시원섭섭하다.

짐을 실은 교회 밴이 퀸즈와 브롱스를 잇는 와잇스톤 브리지를 시원하게 관통한다.

다리 왼편으로 맨해튼 마천루가 화려하게 펼쳐져 있고, 옆에 앉은 아내는 여유 있는 자세로 그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

우리는 뉴욕시 북쪽 브롱스에서 20분 정도 더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나오는 한적한 소도시 A로 이사하였다.

R 형님이 소개한 어느 한인의 집이었다.

총 인구가 5000명이 채 안 되는 정말 조그마한 타운이다.

바로 옆 동네 S는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어서 거리를 걷다 보면 제법 아시아인들이 눈에 띈다.

이 곳 사람들은 집을 마련할 때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집을 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렌트, 즉 월세로 입주를 한다.

올 캐쉬로 집을 구입하지 않는 한, 미국인들은 거의 모두 모기지 론을 받아서 이를 해결한다.

내가 렌트한 그 집은 조금 작긴 하지만, 아주 깔끔한 전형적인 미국 주택이다.

임시로 살기로 한 집이어서 1층은 주인댁이 살고,상당히 넓은 반 지하가 우리 공간이었다.

아내와 내가 이 하우스에 입주한 직후에 한 일은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알아 보는 일이었다.

한국인들이 미국에 오면 제일 먼저 겪는 어려움이 언어 문제다.

나 역시 마찬가지.

문법 위주의 영어 공부만 했던 내가 미국 학교에 가서 의사소통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의 그 R 형님이 또 구원투수로 등판하셨다.

솔직히 그 분께서 구사하는 영어는 그다지 유창하지는 않다.

그런데 자신감이 넘치신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꿀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내뱉는 영어는 놀랍도록 능통하게 들린다.

아주 매력있는 분이시다.

이 날 역시 형님은 우리와 함께 학교를 방문해 달라는 쉽지 않은 부탁을 흔쾌히 승락하셨다.

특이하게 이 곳 교육청은 A 고등학교 건물 내에 있다.

우리네 같으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건물은 멀리서 봐도 딱 알만큼 크지만 여기는 다르다.

로컬 도로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학교 지붕이 보인다.

거의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본관으로 보이는 곳만 2층이다.

학교 주변으로 천연 잔디 축구장과 야구장은 물론 정규 풋볼장이 자리잡고 있다.

미식축구장을 둘러싸고 있는 400미터 트랙은 타탄으로 만들어져 있다.

구내로 들어가니 실내수영장 안내 간판이 눈에 띈다.

교육청 사무소가 저 편에 보이고, 좌우로 개인 사물함 캐비넷이 줄지어 서있다.

 

R 형님은 여전히 낯선 사람 앞에서 전혀 꿀리는 모습이 아니다.

내가 잘 아는 동생인데, 이 학교에 등록하러 왔노라고 직원을 향해 아주 당당하게 이야기하신다.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여자 오피서가 우리를 향해 "Are you Chinese?"라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 미국인들은 아시아인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중국인이냐고 묻는 습관이 있다.

뉴욕엔 정말 중국인이 많다.

A 타운 역시 플러싱이나 맨해튼 차이나타운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살고 있다.

소위 백인 동네라고 하는 곳은 중국 본토 상류층 자녀들이 무차별로 몰려 든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그 푸짐한 여직원이 그렇게 물어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러모로 형님께 신세를 진다.

참 고맙고 미안하다.

 

"엄마, 우리 학교에 중국인 학생이 꽤 있어!"

첫 수업을 마친 딸이 집에 돌아와서 제 엄마에게 이런 말을 툭 던진다.

"한국인 학생은 없어?"

"잘 모르겠어, 아직은. 근데 Lee하고 Park이란 성을 가진 아이들이 있는 것 같애."

용모가 비슷해서 혹 한국인 아니냐고 물었다가 돌아온 대답이 전부 아니다였던 모양이다.

중국인 학생이 많다는 기준이 상대적이기는 하다.

플러싱에서는 한 학급의 50% 이상이 중국인이지만, 여기서는 한 클래스에  많아야 2명 정도다.

미국 중고등학교는 마치 대학교 수업같이 커리큘럼이 짜여져 있다.

한 교실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과목별 선생님이 들어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과목별로 강의실을 찾아가야 한다.

보통 한 클래스는 20명 내외로 구성된다.

이런 이유로 3학년 5반 이런 개념이 없고, 그냥 '2007 Year Class'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아이들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것 같다.

 

초겨울이 찾아와 때때로 싸라기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딸이 나에게 와 숙제를 도와달라고 한다.

일순 긴장이 된다.

'영어로 영어를 공부하고, 영어로 수학을 공부하는 아이한테 내가 뭘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녀가 내 눈 앞에 들이댄 책은 참 다행스럽게도 사회 과목 교재였다.

Civil War에 대한 토론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경험이 없는 녀석이 걱정이 되었나보다.

미들스쿨 8학년에 등록한 지 이제 막 4개월 째로 들어선 그녀이지만 아직 영어가 능숙하지 못하다.

솔직히 걱정이 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빠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뉴욕에 도착한 딸 아이.

이런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딸과 아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넌 할 수 있어, 의지의 한국인이잖아!"라고 만용을 부려보지만 반응은 항상 별로다.

맨해튼 소재 컬럼비아 대학교 한국인 학부생들이 운영하는 무료 영어교실을 이용하고 있지만 극적인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여보, OO가 6개월 내내 강의실에서 한국 만화책이나 ESL 교재만 봤다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요지는 이렇다.

딸 아이는 아들보다 2살이 위다.

그런데 이 2년 차이가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이때 알았고, 한국의 친구들이 중학교 2학년이 마지노선이라고 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아들은 영어를 배우는 속도가 제 누나보다 빨랐다.

학교에 들어간 그해 가을에 열린 합창단 정기연주회에 참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문제는 딸이었다.

중 2 시절까지 문법 위주의 영어공부를 한 아이라 영어 습득 방법론에 한계가 있었다.

쏼라 쏼라~~~이야기해대는 선생님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결국 수업 시간에 딴청을 부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참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딸의 귀에 영어가 영접된 것이다.

정확히 6개월 만에 영어가 귀에 쏘옥 들어오더란다.

계속 듣다보니 득음(?)한 모양이다.

물론 헌신적인 학교의 ESL 선생님의 노고가 있었긴 했다.

가끔 집에도 전화를 걸어 아이들의 소식을 전해주던 참 고마운 선생님.

그냥 영어가 들렸다는데, 하도 신기해서 내가 물어보았다.

"서서히 들렸겠지...정말 그냥 확 들렸어?"

돌아온 대답은 아주 짧았다.

"응, 그냥 확."

그 다음 날부터 딸과 아들의 숙제가 내 손을 떠나게 되었다.

항상 2년 먼저 학년을 앞서가는 딸이 아들의 과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었으니 말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 날 이후부터 영어에 관한 한 아이들의 신세를 지게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딸과 아들이 영어로 인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엄마한테만 가끔씩 속내를 털어 놓았을 뿐 내겐 일절 말 한 마디 안 했던 아이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 조바심이 생긴다.

 

마침 위층에 사는 가족 가운데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둘이나 있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 실력도 뛰어난 남자 친구들이다.

같은 민족이니 애들 학습에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부모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으신 분들이고, 자녀들 역시 그러했지만 공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이 뉴욕에서 거의 미국화된 친구들.

이들에게 한국식의 정을 기대하는건 좀 무리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뉴욕에서 얻은 첫 번째 교훈이 '세상엔 공짜 점심이 없다'였다.

차라리 약간이라도 과외비를 주는 것이 맘이 편하겠다 싶어서 그런 제의를 한 번 던져 보았다.

그 제안은 받아들여져서 짧은 시간이나마 도움을 받았다.

미국식 공부 방법을 그들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큰 유익이 되었다.

체육을 잘 하는 학생들이라, 방과 후 클럽 활동을 같이 하면서 덕분에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던 것은 덤이었고.

어떻게 하면 미국 친구를 사귈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최대의 수확이었다.

오늘도 위층의 형 그리고 오빠와 함께 학교 트랙에 가서 뜀박질한다며 신발끈을 고쳐 매는 아이들 등이 웬지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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