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엔 5개의 보로(Five Boroughs)가 있다.
한국에서도 들어본 적이 있는 맨해튼, 브롱스, 브루클린, 퀸즈, 그리고 스태튼 아일랜드가 그것들이다.
이중 스태튼 아일랜드는 섬이다.
맨해튼 남단에서 이 섬으로 페리가 수시로 운행한다.
배 이용객은 섬 주민보다 관광객이 훨씬 많다.
자유의 여신상을 먼 발치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보로는 한국으로 치면 구가 5개 정도 합쳐진 광역지자체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뉴욕주 행정구역 상으로는 카운티로 부르고, 한국에선 군 단위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뉴욕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브루클린 보로는 뉴욕주 구분으론 킹스 카운티다.
미국에 도착한 뒤 몇 달은 뉴욕시의 가장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퀸즈 보로에 살았다.
5곳 가운데 제일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고, 광할한 지역에 주택가가 넓게 퍼져 있다.
한국에서 뉴욕의 한인촌으로 알려진 플러싱은 이 퀸즈 보로에 속해 있는 시이다.
아마 퀸즈에서 가장 큰 상업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아시아인 밀집도가 높은 탓에 한국인, 중국인은 물론 아시아의 거의 모든 인종들이 바글거리고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다운타운을 지나다 보면 영어보다 중국어가 훨씬 더 크게 들린다.
플러싱은 이제 더 이상 한인타운이 아니다.
중심지를 걸어가면 100% 중국 간판이다.
지난 2개월 동안 한글 간판 딱 1개를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한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들은 퀸즈의 동쪽인 노던 블러버드 이스트, 베이사이드, 리틀넥, 심지어 롱아일랜드로 많이 이주를 했다.
상권도 자연스럽게 그곳에 형성되어 있다.
롱아일랜드는 2개의 카운티가 있을 정도로 아주 길고 큰 섬이다.
중국인 등쌀을 피해, 소위 학군 좋은 곳으로 엑소더스를 한 셈이다.
퀸즈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 위해 짐 정리를 미리 하고 있던 어느 날.
미스터 리가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로 주일예배 드리러 가자고 권유한다.
흔쾌히 승낙했다.
이 먼 땅에서 자리잡고 살고 있는 한인들을 한꺼번에 많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간간이 보았던 대형 한인교회를 상상하며 조금은 들뜬 기분이 되었다.
잠시 거주하던 플러싱 중국인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20분을 달려 그곳에 도착했다.
20평 남짓 되는 공간에 접의자가 40개 정도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강대상 뒤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교회라고 보기 어려운 그런 곳이다.
실망은 조금 되었지만 다들 따뜻하게 맞아주어 생경스러움이 덜어지는 기분이다.
미스터 정은 전자올갠을, 미스터 리는 기타를 신나게 연주한다.
한국에서 밤무대 연주를 했다던 미스터 리는 제법 프로패셔널하다.
악보를 보지 않고 능숙하게 코드를 잡는다.
젊은 목사님의 열정적인 설교 역시 인상적이었다.
원고 없이 교우들과 아이 컨택을 시도하는 모습이 참 멋져 보인다.
미국에서 100% 한국말로 구성된 첫 예배를 드린 셈이어서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다.
예배 후, 한식으로 오찬을 했다.
김치와 잡채 그리고 부추전, 단순했지만 평상시의 이곳에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맛있게 먹는 모습이다.
'일주일 내내 양식을 먹다가 한식을 드시나보다...'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식탁에 놓인 종이 접시들이 전부 깨끗하다.
내 옆으로 목사님이 앉으시면서 "처음 뵙는 얼굴이네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신다.
참 살갑다.
이사를 갈 때까지 주일마다 봤으면 좋겠다는 덕담이 어찌나 다정한지 흡사 친 형님 같다.
'참 매너가 좋은 분이시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친교 시간이 끝나가는지 다들 부산하게 일어선다.
그제서야 예배당에 장의자가 아닌 접의자를 설치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간이 부족해서 예배와 식사 친교를 동시에 진행하기 위해 이동성이 좋은 철제 접의자가 사용된 것이다.
다들 최대한 지혜를 짜내서 교회를 운영하는 모습에 감동이 된다.
담임목사님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 1층으로 내려오다가 다른 교회가 3층에 있다는 걸 알았다.
'한인들이 어떻게든 흩어지지 않고 한곳에 모이려고 노력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뉴욕과 뉴저지에 산재된 한인교회가 900개 정도가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인 커뮤니티의 중심이 교회인 것만은 사실인 듯싶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뉴욕 한인교회의 특성을 리서치한 적이 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
대부분의 블로그 기사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사람들'의 범주가 궁금했었는데, 두 달이 지난 지금 그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신앙이 있든 없든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한국인의 정을 느끼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주차장으로 가는데 미스터 리가 내 소매를 잡아 당긴다.
"우리 목사님이 굉장히 관심 있어 하시던데요?"
요지는이렇다.
담임목사님께서 나한테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매주 주일예배를 꼭 드리러 오란다.
또 다른 R형님 같은 분을 만난 것 같아 성경을 쥔 오른손에 괜히 힘이 들어간다.
오늘은 수요일, 메츠의 홈구장인 셰이 스타디엄의 야간 조명등이 휘황찬란한 밤이다.
양키스와의 인터리그를 한다더니 저 멀리서도 사람들이 꽉 들어차 보인다.
늦은 저녁을 먹던 도중, 미스터 리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 교회에서 여러 사람에게 영주권 스폰서해 주고 있어요."
'이건 무슨 뜬금 없는 이야기일까?'라고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데, 그가 재차 말한다.
"영주권 스폰서 필요하지 않으세요?"
괜히 밥맛이 탁 떨어진다.
그 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이 나에게 보였던 호의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된 것이 못내 불편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 교회에 출석한 지 딱 한 주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제안이 주어지다니...
"아,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 진로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요."
대화가 길어지면 서로의 오해가 커질까 싶어 단칼에 말을 잘랐다.
TV가 없는 이 집에서 이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없다.
스탠드 등도 없는 조그마한 책상에서 양반 다리를 하고 성경을 읽었다.
큰 위로가 된다.
미국 가정집은 한국처럼 직접 조명을 하는 곳이 드물다.
대부분 간접 조명을 해서 저녁이 되면 실내가 좀 컴컴하다.
그래서인가...성경과 내 눈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오후 9시가 조금 넘어 미스터 리가 간식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그는 조금 주저하더니 아까 마치지 못했던 그 얘기를 조심스럽게 다시 꺼낸다.
요지는 대략 이렇다.
내가 그 교회에 출석하기 전 그 목사님께 내 이야기를 했단다.
좋은 사람 같으니 교회에서 케어해 주는 것이 어떠냐고 말이다.
문제는 그 '케어 가격'이다.
차마 내 입으로 여기에다 그 액수를 말할 수는 없다.
자존심 문제다.
그래도 선량하게 최선을 다해 이민 생활을 하시는 분들께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두고 두 사람이 나누었을 그 상황을 상상하기조차 싫다.
다음 날, 분위기도 바꾸고 머리도 식힐 겸 아침 일찍 근처에 있는 플러싱 공립도서관에 가려고 아파트를 나섰다.
도서관 계단엔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중국식 델리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사서, 나도 그들 틈에 끼어 들었다.
어디서 저리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참 신기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행렬 대부분이 아시아인, 더 정확히는 중국인들이다.
홍등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노점상들이 대로를 따라 주욱 들어서 있다.
마치 화개장터를 방불케 한다.
어제 신문에서 이곳이 맨해튼 차이나타운을 곧 능가할 것이라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문득 지난 주에 미스터 정이 플러싱 거리에서 만나는 중국인 3명 가운데 1명이 불체자라고 한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뉴욕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뉴욕 한인 불체자가 5만 명을 넘어섰단다.
뉴욕, 뉴저지 그리고 커네티컷, 이렇게 세 주를 트라이 스테이트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 3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한인들이 거주하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이를 반영하듯 거의 매일 불체자 대사면에 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고, 한인방송에도 이는 단골 메뉴다.
나는 당장 이 하숙에서 불체자 2명과 살고 있지 않은가.
거리 식당 화덕에서 꼬챙이에 끼워진 채로 돌아가는 북경 오리 한 마리가 유난히 돋보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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