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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별곡

9. 어디에나 끼리끼리는 있다.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24.

딸 아이가 어느덧 중학교 8학년, 즉 졸업반이 되었다.

조금씩 친구들을 사귀어 가는 모습이 대견하다.

한 일본인 친구를 사귄 모양인데 서로의 감성이 비슷해 통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하루는 집에 돌아와서는 워싱턴 D.C.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등록을 해야 한다며 투덜거린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한 번 갔다 왔기 때문에 신선함이 떨어졌으리라.

그래도 지난번에 8개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가운데 4군데를 구경 못했으니 이번에 꼭 보라고 부추겼다.

반응이 영 신통찮다.

그렇게 우물쭈물 하다가 그만 등록 시기를 놓쳐 버렸다.

아차 싶어 급하게 학교에 연락을 했다.

다행히 학교 당국이 아직 버스 예약을 하지 않아 여행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부부가 모두 미국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 아이에게 소홀했던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엄마, 근데 아 아무래도 선생님하고 한 방을 쓸 것 같아..."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 말을 옆에서 귀동냥으로 얻어 듣던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응, 뭔 일 있었어?"

나는 일부러 무관심한 척하며 딸에게 말을 건넸다.

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여행 등록이 늦은 탓도 있었지만 근본 원인은 다른 것에 있었다.

녀석이 내게 서류 하나를 슬쩍 내민다.

여행지 호텔방을 같이 쓰고 싶은 사람을 적어 내는 다큐멘트였다.

5순위까지 적도록 되어 있었는데, 상위 순번인 1~2칸에 아무도 딸과 같은 방을 쓰고 싶다고 쓴 학생이 없었단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라도 학교 생활을 1년을 갓 넘긴 이방인 여학생과 함께 밤새 수다를 떨 수 있기는 어렵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딩동~~~

워싱턴 D.C.에서 딸이 전송한 사진이 도착했다.

반가움에 앞서 아이의 표정부터 살피게 된다.

조그마한 화면인데다 확대 기능이 시원찮아서 잘 보이질 않는다.

사진과 함께 녀석이 보낸 문자가 맘에 걸린다.

ESL 선생님, 그리고 3명의 흑인 여학생과 함께 같은 방을 쓴단다.

속이 좀 상한다.

아니 더 솔직히는 쓰라리다.

내 기억이 맞다면 A 중학교 졸업반 클래스 가운데 흑인은 딱 3명이었는데, 그 학생들과 이틀 밤을 자야 한다는 그 사실.

음식을 먹다가 무언가가 목구멍에 탁 걸린 느낌이 든다.

나는 절대 인종차별자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종적 Diversity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뉴욕에서의 몇 년 동안 히스패틱 계통 사람에겐 몇 번 안 좋은 일을 당했지만, 흑인들에겐 좋은 기억만 있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한 번도 제 엄마 아빠한테 싫은 소리 한 적이 없는 아이라서 더 걱정이 된다.

혼자서 끙끙 앓다가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애가 탄다.

 

 

"어디에나 끼리끼리는 있는거야."

내가 딸에게 보낸 답신이었다.

궁색하긴 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백인 동네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상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여행을 마치는 순간까지 그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라고 당부했다.

천만 다행인 것은 ESL 선생님이 한국인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한국말은 거의 못하는 100% 미국 사람이다.

껍데기(?)만 한국인이었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만이 갖는 정이 있는 분.

하지만 탁 터 놓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나 스스로에 대해 자책이 된다.

순간 경기도 부천에서 살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부천 중동은 신도시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다.

하지만 건물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늘도 길어지는 법이다.

신도시에서 경인고속도로 진입로 방향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조그마한 공장들이 들어선 골목들이 즐비하다.

그곳의 노동자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다.

참 신기한 것은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일하는 남녀 사이에 정이 들고 애들이 생겨났다.

그때 아내는 어린이집 원장이었고, 상당히 많은 아이들을 교육했다.

형편이 넉넉치 않은 맞벌이 부부들을 위해 종일반을 운영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던 그 시절.

참 희한한 것이 거리에 나가보면 혼혈 아동들은 분명히 있는데, 정작 아내의 시설에는 단 한 명도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저 아이들은 도대체 누가 돌보나...' 이런 생각을 자주 했던 그 시절이었다.

한국인들의 편견이 무서웠을지, 아니면 스스로의 자격지심에 갇힌 결과물인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의 그들은 한국 사회의 마이너리티였고, 난 현재 미국의 마이너리터라는 사실.

 

마침 R 형님이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그분께 딸이 보낸 문자를 보여 주면서 살짝 고민 상담을 요청했다.

씨익 웃으시는 형님.

그러시더니 이런 말을 내게 건네신다.

"걱정마, 결국엔 자네 딸도 결국은 끼리끼리 놀게 되어 있어."

"무슨 소리에요?"

궁금해 하는 나에게 형님은 충격적이면서도 한 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에게는 딸이 한 명이 있다.

퀸즈 베이사이드에 소재한 C 고교에 다녔는데, 그 학교는 중국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한국인 학생도 적지 않게 재학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이 두 인종 사이에 갈등이 대단하다. 

교내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나온 적도 있어서, 학교 내에 무장 경찰이 상주하는 그런 학교다.

하루는 학교의 선생님으로터 전화가 와서 놀란 마음으로 웬일인가 싶었단다.

내용인즉, "아, OO 아버님이세요? 부인이 돌아가셔서 얼마나 상처가 크세요. 위로 드립니다"였다고 한다.

이게 무슨 Dog Voice가 싶어, "누가 죽었다고요?"라고 되물은 것은 당연지사.

내막은 이랬다.

학교의 한국인 친구들하고 놀러가고 싶어서 엄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를 3일 땡땡이를 친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서 형님의 얼굴을 쳐다 보았지만, 그는 아주 담담하다.

사실 당신도 살짝 화가 나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얼마나 어울리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야단을 치지 않았다고 한다.

속으로는 그래도 딸자식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을 벗들이 있구나 싶어서 외려 안심이 되더란다.

그러면서 내 어깨를 툭 치시며 이런 말을 건네신다.

"너무 백인 주류 사회에 애들을 밀어 넣으려고 하지마. 그렇게 될 수도 없고 설령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물과 기름이야."

형님께서 나에게 조언하신 말의 핵심은 이렇다.

아무리 미국에 오래 살아도 같은 문화권의 사람끼리 교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미국에 대해 배운 것과 사뭇 그 내용이 달랐다.

미국하면, Mixed Bowl로 요약되는 다문화 국가인데,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되물었다.

"형님이 혹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녜요? 아니면 적응이 좀 안 된 것이거나..."

아주 직설적으로 질러 버린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표정은 아주 침착하다.

"아니 아니, 미국 사회는 깊이 들어갈수록 차별이 심한 구조를 갖고 있어. 아시아계는 더더욱. 현실을 직시해야 해."

 

이런 대화의 와중에, 커네티컷 다리엔에 살고 있는 K 씨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참 선량하고 영화배우 같이 생긴 젊은 세탁소 사장이다.

가끔 가게를 방문하게 되면, 카운터를 보시는 그의 노모님께서 나를 붙잡고 항상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내가 나쁜 년이야. 저리 앞날이 창창한 젊은 녀석을 세탁소 기계나 돌리게 하고 있으니 말야..."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 경영대학원, 즉 MBA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골드막삭스에서 중견 간부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아시아인이었고, 바늘 구멍 같은 백인 주류 사회에 편입했던 상류층 화이트칼라였다.

그런데 그의 현실은 아담한 세탁소 사장이다.

명색이 사장이지 세탁소 기계를 돌리고, 세탁물의 때를 벗겨 내는 스파터이자, 카운터 매니저는 물론 딜리버리 차량까지 운행한다.

돈은 잘 버는지 몰라도 외형은 전형적인 밑바닥 3D 업종 종사자다.

그가 사는 지역의 백인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그 이유를 K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아주 심플했다.

"네, 형님, 저는 딱 거기까지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R 형님과의 대화가 거의 마쳐갈 무렵, 딸이 발랄하게 문을 열며 들어온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나와 형님께 툭 던진다.

"아빠, 우리 ESL 선생님이 임신하셨대. 너무 좋아하신던걸?"

그러고보니 그 선생님이 한국인이었구나 하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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