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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별곡

12. 미국 속의 한국(1) : 어느 한인 마트 이야기(1)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24.

20**년 을씨년스럽게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봄날.

 

"야, 이 O새끼들아, 똑바로 줄 안 맞춰?"

A 상무가 물류 창고에 한인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눈을 부라린다.

오른손에 긴 막대기가 하나 들려 있다.

누가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후려갈길 태세다.

자기 분을 못이겨 식식거리더니 웃통을 벗어 젖힌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야, 너. 여기가 뭐 장난치는 곳인 줄 알아!" 하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중절 하는 나에게 성큼 다가선 그가 재차 다그친다.

"너, 아까 점심시간에 저기 짱박혀서 놀고 앉았더라. 여기가 놀고 먹는 곳인줄 알아?"

이건 또 뭔 Dog Voice인가.

웃음이 피식 나온다.

무엇보다 나이든 직원들에게 반말을 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본사에서 파견나왔다는 직원들이 더 긴장하면서 오와 열을 맞추는 모습이 생경스럽다.

마치 이미 여러 번 당해봐서 익숙하다는 행동들이다.

 

지금 나와 직원들이 닥다구리 당하는 이 곳은 뉴욕시 북쪽에 위치한 W 카운티의 한 대형 몰에 막 입점한 한인 마트다.

영문 이니셜만 대도 모두 알만한 유명 브랜드다.

위에 언급한 해프닝의 전말은 이렇다.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몰려사는 뉴욕시와 뉴저지에 더 이상 마켓 파워를 기대할 수 없게 된 이 마트 회장이 이 곳에 지점을 하나 세운 것이다.

W 카운티 남부는 그나마 한인들이 조금 모여산다.

이 한인들과 미국인을 상대로 한 상품을 적절하게 섞어 런칭을 시도한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빈 공간에 매대를 완전히 새로 셋업하는 일을 경험이 일천한 초짜 직원들을 데리고 하려니 속도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예의 이 A 상무가 직접 진두지휘를 시작했다.

이 한인마트의 조카라나 뭐라나 파워가 꽤 있어 보이는 작자였다.

 

당시 나는 프리랜서 작가 겸 교열 전문가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때였다.

너무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어서 육체 노동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이기도 했다.

군청 소재지 근처에 일을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한창 내부공사 중인 이 마트를 구경하던 도중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속으로 잘 되었다 싶었다.

몸무게도 줄일 겸 부업으로 할 만하다고 생각되어서, 안으로 들어가 점장을 만났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넨다.

아주 간단한 서류다.

이틀날 다시 그 곳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했다.

나는 점장에게 일요일은 무조건 쉰다는 조건을 걸었다.

얼굴을 들어 날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하다.

'집으로 가라고 하겠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아온 대답이 의외다.

당장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란다.

별 희한한 인터뷰가 다 있지 않은가.

직업을 구하는 주제에 조건을 걸었는데도 통과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 한인 직원 구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부업으로 이 일을 시작하겠다는 나의 판단은 완전히 오산이었다.

일단 하루 8시간만 일하겠다는 계산부터 빗나갔다.

물론 내가 우기면 그렇게 할 수는 있다.

주일은 쉬겠다는 조건부터가 굳이 나를 채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이었는데도 받아들여진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나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고 팀으로 활동하는 작업 환경이 단독 플레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괜히 똥고집 부리는 나로 인해 다른 동료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와 특히 친하게 지내던 B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나이 65세가 훌쩍 넘은 그는 커네티컷에서 이 곳까지 달려와 잡을 구했다.

그만큼 그는 돈이 급했고, 시간 외 수당이 두둑히 쳐주니 더더욱 좋아했다.

하루 12시간, 어떤 때는 아침 7시부터 밤 10시 넘어서까지 일을 했다.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 아니 김장 배추 절임이 되었다.

아내가 근심어린 눈길로 날 쳐다보지만, 난 그걸 의식할 새도 없이 그냥 곯아떨어진다.

 

철제로 만들어진 매대 프레임들은 정말 무겁다.

본사에서 나왔다는 근육질의 젊은 차장 하나가 우리에게 시범을 보인다.

10여 개를 뚝딱 프레임 구멍에 정확히 맞춰 조립한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키는 자그마한데 손놀림이 정말 프로패셔널하다.

남미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서반아어가 유창하다.

한인 직원보다 훨씬 인원 수가 많은 히스패닉 직원들 통역을 그가 도맡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차장이 자리를 떠나면서부터 발생한다.

대충 눈대중으로 프레임들을 조립하다보니 삐뚤빼뚤 엉망이다.
내가 봐도 참 한심한 수준이다.

당연히 예의 그 근육질 차장이 다시 와서 재조립을 하고, 욕을 한다.

애들 말로 무지하게 쪽팔리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타임이다.

미국 노동법은 칼 같이 1시간을 보장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30분 정도 주어진다.

"아이고, 다리야..."

긴 시간 동안 쪼그리고 철제 프레임을 다루고, 무거운 냉동식품을 셋업하다보니 허벅지와 종아리에 알통이 배겼다.

조그만 눌러도 통증이 장난아니다.

특히 오늘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물건을 다루다가 어깨까지 고장이 왔다.

입에선 단내가 난다.

'아, 부업이라고 생각했는데...이건 정말 아니구만...'

단순한 현장 체험 정도로만 여겼던 나의 완전한 판단착오였다.

1년은 고사하고 2개월도 못버틸 것만 같다.

이 마트 뒷편으로 자그마한 동산이 하나 있고, 본사에 수송해 온 물건들을 얹은 팔레트들이 주변에 줄지어 놓여 있다.

그 팔레트를 가림막 삼아 아내가 싸준 김밥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뭔가 쎄한 느낌이 나의 정수리에 감돈다.

얼굴을 들었다.

예의 그 A 상무가 나를 노려보더니 훽 하니 몸을 돌린다.

 

난 이제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점심시간을 제멋대로 축내는 식충이가 범인이었고, 그건 바로 나였다.

'아마도 35분쯤 사용한 그 시간이 그리 회사에 피해가 갔었나...'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법이 정한 1시간도 아닌데 괜히 성질이 돋구어진다.

건물 밖에서 짱박혀 식사하는 종업원 하나가 그의 비위에 맞지 않았던 그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미국 땅에서 70년식 군대 집합 문화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한 마디 하려고 몸을 돌리려 하는데 옆에 서 있는 B가 얼굴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아...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눌러 앉힌다.

귓전에는 여전히 욕설이 맴돌고 있다.

 

"P 씨, 그냥 바더하지 말고, 주눅든 체하고 지냅시다. 그리고 적당히 일해요."

집합이 끝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B가 차분하게 말을 건넨다.

그는 알통이 배겨서 행동이 불편한 나를 바라보면서 혀를 찬다.

본사에서 파견나온 젊은 과장과 차장, 그리고 상무가 설쳐대는 모습에 늘 불만을 가진 나 때문에 현지 신참들이 불이익을 받을까 노심초사하는 그에게 딱히 내가 건넬 말은 없다.

일년에 지점을 3~4개씩 개점하는 한국 회사에 내가 특별히 불만족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자부심인 있을지언정 말이다.

하지만 여긴 미국에서도 뉴욕이다.

뉴욕 사람들을 뉴요커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측할 수 없는 뉴욕 사람 특유의 자유분방함 때문이다.

통제와 규율로 대변되는 상명하복의 군대식 기업문화.

정말이지 숨이 막힌다.

 

지난 주 월요일에 점장이 나와 L 씨를 따로 불러 은근히 압박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와 나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주일은 반드시 쉬어야 하니 채용을 하려고 하고 말라면 말라고 했던 아주 특이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두계약이다.

검은 피부의 그가 하얀 눈알을 굴리며 "어제 바빠 죽었는데 그렇게 쉬니 속이 시원해요? 다른 직원들이 두 사람만 특혜를 준다고 불평해서 내 입장이 좀 곤란한데..."하고 한다.

이 사람은 그래도 상대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한다.

하긴 작은 아버지뻘인 L 씨에게 반말하긴 좀 그렇겠지만.

"그럼 자르세요. 내일이라도 그만둘께요."

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을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굳이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는 것도 있었지만, 여긴 미국인데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여기에선 구두계약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만일 이를 어기면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미국에서 공학석사를 마쳤다는 점장이 이를 모를리 없다.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서 이 곳에서의 나의 미래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