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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별곡

13. 미국 속의 한국(2) - 어느 한인 마트 이야기(2)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24.

20**년의 어느 여름날.

 

연일 화씨 100도가 넘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등판대기에 땀이 줄줄 흐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매장 안은 서늘해서 그나마 살 만하다.

오늘 나는 그로서리 파트에서 전자부로 부서를 옮겼다.

뭐 별다른 이유는 없다.

체격도 그저 그렇고 덩치도 그다지어서 무거운 짐을 나르기에 부적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래는 모가지가 날아가야 정상인데, 이 곳은 오픈 매장이라 인력이 아쉬운 탓에 자리만 옮기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나에겐 그닥 나쁜 일은 아니었다.

깨끗한 물건을 다루는 일이니 옷이 더러워질 일이 없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다만, 파트 직원이 나 혼자여서 바쁘신 매한가지였다.

하루 종일 전자부에 배정된 기다란 복도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물건을 정리했다.

가끔 '덩어리져서 일했던 옛날 부서가 재미는 있기는 했는데...'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는 한다.

 

"P 씨, 오늘 아주 말끔한데?"

반찬부에서 일하는 Y과장이 내가 일하는 복도를 지나며 아는 체를 한다.

Y는 이 곳에서 꽤 떨어진 플러싱에 사는 여자다.

원래는 불체자였는데 시민권 남자와 결혼을 해서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사람이다.

그녀는 퀸즈 노던 블러버드 지점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기로 잠시 파견을 나온 터였다.

그런데 간혹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한 번은 다른 부서 직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느닷없이 나타나 "난 잘 생긴 남자가 좋더라!"하면서 팔짱을 낀 적도 있다.

뭔 수작인지 모르겠다.

내가 바람둥이라면 불륜 저지르기 딱 좋은 스타일이다.

그런 Y과장에게 내가 물었다.

"과장님, 그건 그렇고, 오늘 H 씨가 안 보이네요?"

H는 Y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평직원이다.

그녀는 이 한인 마트에서 일하기 직전 제법 잘 나가는 네일가게 사장이었는데, 무슨 사연인지 이 곳까지 흘러들어온 여자다.

 

바로 그제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마트 밖에 있는 내 차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데, 이 H가 바로 옆에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무슨 일은요. 다리가 너무 아퍼서..."

H는 나에게 퉁퉁 부어오른 왼다리를 내게 보여준다.

깜짝 놀랬다.

'아니 무슨 발이 저렇게 부어 오를 수 있담...' 

사정은 이랬다.

그녀는 커피 중독자다.

네일 가게에서 일할 때에는 하루에 30잔 가까이 마셨다고 한다.

정말 믿기 어려운 말이다.

커피가 좋아서라기 보단 카페인 효과를 기대서 일하지 않고는 그 고된 일을 할 수가 없었단다.

나중엔 그녀가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커피가 그녀를 마셔 버렸다.

결과적으로 H의 발은 통풍이 와 버렸고, 그럼에도 커피를 끊지 못한 그녀는 카페인으로 인한 상습적인 염증 재발로 고통받게 되었다.

심하게 부은 발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 없어, 슬리퍼를 끌고 다니다가 점장에게 몇 차례 지적받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너무 안타깝다.

 

"아니, 또 커피를 마셔요?"

퇴근 직전에 복도에서 다시 H를 만났는데, H의 오른손엔 커피가 든 종이컵이 쥐어져 있다.

"딱 한 잔만요...참 끊기가 어려워요..."

답답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커피 중독이 마약 중독 만큼이나 무섭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녀는 여전히 하루에 10잔 가까이 커피를 드링킹한다.

매장 안에 있는 한인 빵집은 마트 직원들이 커피를 구매하면 무한 리필이라는 혜택을 제공한다.

이 인센티브가 그녀의 질병을 악화시키는 꼴이다.

H는 카페인 효과가 거두어지게 되면 퇴근길 승합차 안에서 통풍 재발로 발목을 부여잡을 것이 뻔하다.

외모와 풍채가 방실이를 닮아 별명이 '방실이'인 그녀는 아마도 이 병 때문에 또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그녀는 오늘 결근을 했다.

병원에 약을 타러 간 모양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뚝뚝 흘리던 H가 생각나 괜시리 걱정이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물건을 정리하던 도중에 갑자기 캐시어들이 일하는 레지스터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온다.

자세히 살펴보니 전자부 복도와 바로 연결된 곳이다.

무슨 사고가 났다 싶어 달려갔다.

내가 잘 아는 여직원 하나가 울면서 커스터머 서비스센터로 걸어간다.

그녀는 대학을 휴학 중이고, 이 곳에서 일하는 아빠와 삼촌을 따라 임시 캐시어로 일하고 있다.

그 곳 담당자인 S에게 뭔 상황이냐고 물어보았다.

"손님이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항의를 했나봐. 근데 저 녀석이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니까 화를 낸거지 뭐."

"아니, 그랬다고 저 아이가 왜 저리 울어? 맞았어?"

정황은 이랬다.

직업이 변호사인 그 여자 한인 손님이 유창한 영어로 말대답을 하는 그 여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야, 너 시급 얼마야? 난 200불이다. 너 얼마 받냐고?"

충격적이었다.

한국말이 서툴러 영어로 말한 것 뿐인데 그 여 변호사가 열등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에 시급이 왜 언급이 되었을까.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난 그녀의 분노에 대해 진한 동질감을 느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내 발등 위로 냄비 꼭지 하나가 툭하고 떨어진다.

퍼뜩 지난 주에 일어났던 사건 하나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니, 그러니까 내 며느리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거야?"

"그게 아니라, 차분하게 제 말을 좀 들어보시죠."

"뭐 이딴 게 다 있어! 어따 대고 우리를 사기꾼으로 모는거야! 점장 나오라고 해!"

"......"

이 해프닝의 전말은 이렇다.

젊고 예쁘게 생긴 여자 하나와 시어머니인 듯한 노파가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를 들고 환불해 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이를 위해선 당연히 영수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수증이 없단다.

더구나 이 지점에서 구매한 것이 아니고 뉴저지 지점에 지난 주에 구매했단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환불은 고사하고 교환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무엇보다 이 제품은 꼭지가 떨어져 덜렁거릴 정도로 사용한 지 꽤 된 상태다.

아무리 손님이 왕이라지만 이 경우엔 해당이 안 되는 케이스다.

 

"네, 정 그러시다면 점장님 오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냥 바꿔 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꽉 막혔어."

"제겐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됐어요! 당신 이거 가지고 잘 먹고 잘 살아!"

앙칼진 목소리가 앙상블을 이루며 내 귓전을 때리는가 싶더니 예의 그 냄비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나마 간당간당 달려 있던 꼭지가 떼구르르 바닥을 종주한다.

이건 진상이라고 규정하기에도 좀 애매한 경우다.

뭐랄까 그냥 환자들이다.

홱 몸을 돌려 카트를 끌고 휘적휘적 복도를 빠져 나가는 그녀들을 난 그저 황망히 바라볼 뿐이다.

마음을 겨우 추스려 다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게 또 뭔 일인가.

그녀들이 다시 복도로 진입한다.

아연 긴장이 된다.

그런데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간다.

다소 안심이 되는가 싶던 차에 그들이 내뱉은 짧은 외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찌른다.

"저 주제니 이런데서 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