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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별곡

14. 미국 속의 한국(3) - 어느 한인 마트 이야기(3)

by 크레이지티처 2021. 3. 24.

"하이, P 상... 지금 6개월째 수금이 안 되고 있는데... 점장한테 얘기 좀 해 줄 수 있나요?"

미스터 나카무라는 이 곳에 일본 그릇을 납품하고 있는 사내다.

나이는 60을 넘었지만 참 나이스하고, 항상 서글서글하게 웃는 사람이다.

단 한 번도 인상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내게 무리하게 상품 입고를 권한 적도 없다.

소량의 물건이 필요해서 전화를 걸면 언제나 흔쾌히 배달을 해 주는 그런 세일즈맨이다.

한 마디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나이스 가이가 바로 그다.

이랬던 나카무라가 아주 조심스럽게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며 내 눈치를 본다.

참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하다.

이런 대형 마트가 어떻게 반 년 동안이나 물품 납품만 받고 돈을 지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대금 결제에 관한 한 나에겐 아무 권한이 없다.

점장에게 말을 해봤자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너나 잘 하세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뉴욕 주 여러 곳에 물건을 납품하고 있는데, 이렇게 길게 대금 지불을 하지 않는 곳은 처음이란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희미하게 내게 흘리는 미소가 어째 달갑지만은 않다.

내심 어글리 코리안에 대한 비웃음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러면서 내게 넌즈시 묻는다.

"주급은 제대로 받나요?"

 당연한 의심이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더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이 한인 마트가 이토록 어렵게 버티는 밴더들을 깔아 뭉개면서 영업 확장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오늘은 미스터 나카무라에게 물건 오더를 하기가 참 민망하다.

결국은 또 외상일테니 말이다.

 

 

그를 보내고 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마치고 매장에 내려 오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이 나를 반긴다.

그로서리 파트에 납품하는 도매상 직원 D다.

부서는 다르지만 그래도 말이 통하는 한인이라 터 놓고 지내는 사이다.

그의 옆에는 그로서리 담당 과장이 서 있다.

둘이 나누는 대화 역시 결제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은 어째 마가 꼈나 왜 이러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데 D가 얼굴을 내게 돌리며 하소연을 한다.

"아니, 우린 도대체 뭐 먹고 살란거야 **. 9개월 동안 돈을 안 줘."

이건 또 무슨 소리.

나카무라보다 더 심한 케이스가 아닌가.

그의 말에 좀 뻥이 들어 있다손 치더라도 길기는 긴 시간이다.

 

열이 받은 D가 계속 말을 이어간다.

"아니, 대금은 주지도 않으면서, 자기네 PB는 매대에 좌악 깔고, 도대체 양심들이 없어!"

"PB가 뭐야?"

이런 3D 업종 밑바닥 근무가 처음인 나는 이 PB가 뭔지 잘 모른다.

Private Brand의 약자가 그것이었는데, 쉽게 말해 자사 상품을 만들어 직판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집 근처의 대형 리테일 매장인 STOP & SHOP에도 이런 제품들이 깔려 있기는 매한가지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누가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상윤리라는 것은 있다.

소규모 밴더들은 이런 대형 마트에 납품을 할 때에 철저히 을의 위치에 선다.

지속적인 세일을 위해 원가 할인을 요구하는 것은 기본이고, 대금 지연은 상식이다.

툭하면 경쟁 밴더들을 언급하면서 묘하게 갑의 위치를 고수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김을 납품하는 밴더의 어느 물건이 인기를 끈다고 치자.

일정한 기간까지 할인 행사를 통해 상품 인지도를 높인다.

그런 다음 특가 판매를 중지하고 원래 가격 레벨을 붙인다.

고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한 달 정도 판매량을 살핀 후, 매출이 준다 싶으면 할인을 다시 실시하기도 한다.

물론 밴더들의 원가 희생이 뒤따른다.

이러다가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는 김이 발견되면 이것을 즉각 벤치마킹해서 매대에 진열한다.

이렇게 되면 그 김을 마트에 납품하던 밴더는 당연히 퇴출된다.

지금 내 앞에서 흥분하고 있는 D의 회사가 딱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 친구는 지금 내 앞에서 위에 언급된 프로세싱의 비극적 엔딩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말단 주급쟁이가 뭘 하겠는가.

그것도 곧 사표를 낼 사람이 말이다.

근데 참 내 맘이 찝찝하다.

이런 지저분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가 심호흡을 해보지만 역부족이다.

경쟁을 기본 모토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이런 경우를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형 마트에 물건을 납품하고 싶은 밴더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D의 회사는 그나마 행운인 셈이다.

문제는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법에 호소할 수도 있겠지만, 약육강식의 논리가 가장 잘 적용되는 분야가 법조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방법은 딱 하나다.

줄 때까지 버티는 것 말이다.

물론 그 전에 회사가 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내 경험상, 잡념을 잊게 하는 최고의 수단은 육신을 고단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정신없이 물건을 셋업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치며 말을 건넨다.

"어이 P 씨. 사람이 와도 모를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하네?"

본사에서 나온 K 과장이다.

'아, 그렇지...오늘 물건 오더하는 날이구나...'

인상 좋은 그는 예의 그 오더 페이퍼를 꺼낸다.

내 의사와는 별 상관없이 물건 수량을 적어나간다.

"과장님, 저기 위를 좀 봐요. 안 팔린 상품들 쌓아 놓은 것 안 보이세요?"

내가 가볍게 항의를 한다.

소용없다.

본사에서 정한 수량을 무조건 소화해야 한다.

할인을 해봐야 팔리지도 않는 제품들은 물론 고가의 전기밥솥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오늘도 나는 이 마트에서 내 주관대로 할 일이 하나도 없다.

창의성은 엿이나 바꿔 먹으면 된다.

이들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육체 덩어리인 듯하다.